아래 복거일 이야기가 나오고... 그와 관련해서 그가 '이상한' 서평을 쓴 <4의 규칙>에 대해서도 좀 언급이 되었군요. 그러고보니까 생각나서 옛날에 이를 비롯한 몇가지 책을 읽고 간략한 감상문을 쓴 게 생각나서 그냥 올립니다. (꽤 오래전에 쓴 거라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좀 많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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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팬이다. 빠돌이라고 불러도 좋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의 ‘명성’이다. 또한 현재 기호학자로서 그가 쌓아놓은 위치가 이와 별 관계없는 그의 소설에 aura를 씌우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d

어찌됐건 나는 그의 소설이 나오는대로 사두거나 파일로 만들어 하드에 저장해 두고 있다. 그의 기호학 책까지 읽어봤지만 이게 결국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여타 기호학자들의 학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문외한인 나로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필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재미있고 재치가 느껴지지만... 우선 상대적으로 평범한 내용이라 지적인 자극이 적을 뿐 아니라 가끔씩은 내가 직접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못된 사실도 쓰여 있다. 소설의 경우는 이 두가지의 경계선상에 있다. 즉 일반인으로서 아예 주눅이 들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부분과 ‘이정도면 나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교차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이 나같은 사람에게 묘한 긴장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제 지적인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에코는 하나의 산이 되어 있다. ‘지적인 소설’과 에코는 거의 동일한 화두를 지칭한다. 그러다 보니 그냥 심심할 때 넘기는 pulp fiction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에코를 능가하는" 이라거나 "제 2의 에코"라는 광고 용어는 거의 클리셰 수준이 되고 있다. 역시 낑낑대면서 어려운 내용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도 자본주의 시장에서 무시 못할만한 타겟인 모양이다. 

 

일반적으로는 역사에다가 추리소설적인 분위기를 띠고 여기다가 약간 지적인 분위기를 곁들이면 이걸 에코적인 분위기로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지적'이라는 게 대체 뭔가? 사실 소설을 쓰면서 제딴에 이런저런 지식 부스러기를 섞어넣는 것 만큼 쉬운 일도 없다. 뭐 광고라는 게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어야 한다는 건 하나마나한 소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 한번 알아보고 싶어 광고에서 에코를 들먹인 작품들만 구해다가 몇 권 읽어 보았다. 역시 역사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 아줌마의 이탈리아 시리즈는 에코의 분위기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여기에서 제외했다. 다음은 그 독후감....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 잘 알려진 시리즈물이다. 그런데 에코와의 공통점이라고는 다만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수도사가 탐정 노릇을 한다는 점뿐이다. 뭐 역자는 이게 장미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 작품이니 오히려 그쪽이 표절이라고 난리를 치더라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 중세시대 장면들과 식물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는다는 점 이외에는 사실 별 내용이 없다. 젊은 남녀주인공들의 달착지근한 연애담과 아주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오히려 같은 할머니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와 닮은 듯한 느낌이다. 

마가렛 두디의 탐정 아리스토텔레스 : 사실 이건 에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야 따지자면 역사추리소설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중세시대와 고대 그리스시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 어쨌든 여기 묘사된 그리스 시대 사회상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여기에 묘사된 대로 활동했는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여기 나온 만큼 인격자였으리라고는 거의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 너무나도 유명한 베스트셀러라서 언급하기도 어색할 지경이다. 그럭저럭 읽을만한 이야기인 건 맞지만 이렇게 난리를 칠 필요는 없지 않나? 뭐 하긴 따지고 보면 베스트셀러 가운데 질적으로 높은 작품이 몇편이나 되겠는가. 아무튼 마법이나 판타지같은 분위기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너무 리얼리스틱한 분위기로 빠지는게(어, 이거 스포일러인가?) 별로 맘에 안든다. ‘푸코의 진자’의 경우 끝까지 환상적인 분위기와 사실적인 분위기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남녀주인공의 성격은 그럭저럭 맘에 든다. 속편이나 프리퀄이 나오면 그냥 읽어줄 수는 있겠다.

매튜 펄의 단테 클럽 :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직접적으로 에코를 들먹이며 광고를 한 기억은 없군. 물론 다빈치 클럽은 언급됐지... 우선 말하고 싶은 건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는 점이다. 가끔씩 원작을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터무니없는 오역은 그만두고라도 분명 중의적인 표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한 애매한 문장을 그냥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주인공들은 모두 같은 동료들인데 이들이 나이순으로 칼같이 서열이 정해져서 깍듯한 존대말, 반말로 나뉘는 대화체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런데 내용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소설 가운데서도 따지고 보면 이게 가장 정통적인 추리물이다. 본격 추리물의 특징인 잔인한 장면이나 독자들과의 두뇌싸움이 제일 선명하게 드러난다.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실제 인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 
(이것도 스포일러이긴 한데... 그런 류의 maggot(구더기)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이인화의 머나먼 제국 : 유명하긴 한데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전반적으로 재미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좀 말이 안되는 장면이 너무 많다. 금등지산지 뭔지 이상한 책이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엔 아무 쓸데 없는 짓으로 판명나기도 하고...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더욱 황당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친구는 이정도의 작품이 한계인 모양이더군. 그 영혼을 불태워 쓴다던 박정희 일대기 소설은 어떻게 되어가는건가?

송대방의 헤르메스의 기둥 : 1권은 벌써 품절이더군... 이것 때문에 처음으로 e-book 이라는 걸 한번 신청해 보았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한 장 넘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미리 책갈피를 꽂지 않으면 원하는 페이지로 바로 가는 기능이 없다. 그나저나 약간 기대를 했는데 내용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이야기가 좋건 나쁘건 간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 말을 또하고 또하고 반복하느냔 말이다. 전반적으로 문학 소양이 별로 없는 미술사학도의 습작 정도로 보인다. 다음 번에는 좀더 나아지길...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 에코가 학자라면 이 사람은 기자이다. 이는 절대 레베르테를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깊이 면에서 얇은 대신 폭이 더 넓다. 어떤 분야에서 대가의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는 것 이외에 더 욕심을 내지는 않는다.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보기엔) 전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고서도 떳떳할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정치나 철학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잘은 모르지만..."하고 주뼛주뼛하던가? 초보자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주 당당하다. 단순화하자면 에코도 다소 이런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머리는 좋은데 전문가가 못되는 사람들은 한 문장이라도 틀릴까봐 매우 조심하며 여러 가지 문헌을 보고 재삼 확인한다. 그러다보니 자연 지식의 폭은 넓어지게 된다. 레베르테는 이런 부류이다. 

그의 문장력은 매우 뛰어나다. 소설에 나오는 아름다운 글귀는 충분히 에코식의 해학과 맞설 수 있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까지 갖추었지만 '뒤마 클럽'은 재미 면에서 이보다 떨어진다. 리얼리즘으로 시작해서 초현실적인 상황으로 변하는 것.... 다빈치 
클럽과는 반대의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완 콜드웰 및 더스틴 토머슨이 공저한 ‘제 4의 규칙’이라는 소설이 새로 나왔다고 하던데... 그 정치관이나 도덕성은 믿을 수 없으나 문학적 재능 하나만은 어느 정도 신뢰하는 복거일이 추천한 책이니 시간 날 때 한번 보기는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