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월드님과 칼도님의 대화와 관련, 칸트의 윤리 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역, 아카넷) 본문을 퍼옵니다. 참고가 되실 것입니다. 블록 글씨로 강조하는 사람은 저입니다. 다른 분들도 칸트의 문장을 직접 음미해 보시면서 두 분간에 벌어진 논쟁의 의미를 반추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1. 거짓 약속의 보편적 의욕의 가능성과 모순의 문제


 ...과연 거짓말 약속이 의무에 맞는가 어떤가 하는 이 과제에 대한 답을 아주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속임수 없이 제시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진실되지 못한 약속을 통해 곤경을 벗어난다는) 나의 준칙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든 그가 거기에서 다른 방도로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다면 진실되지 못한 약속을 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나에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내, 내가 비록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도무지 거짓말 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의욕할 수 없음(스스로 원할 수 없음-인용자 주)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아예 약속이라는게 있을 수 없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나의 거짓 둘러대기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장차의 행위에 대한 나의 의지를 거짓으로 둘러대어 보았자 그것은 헛일일 터이고,...그들은 똑같은 화폐로 내게 되갚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준칙은 그것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자 마자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욕이 윤리적으로 선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먄 할 것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무런 자상한 통찰력도 필요하지 않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 경험이 없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대처할 능력이 없어도, 나는 단지 자문하면 된다. '너 또한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준칙은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너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생길 손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 수립에서 원리로서 적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나에게 이러한 보편적 법칙 수립을 존경하도록 강요한다. 비록 나는, 이 존경이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지를 통찰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사실은 이해하고 있는 바이다. 즉, 그것은 경향성에 의해 칭찬 받는 것의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 그리고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위들의 필연성은 의무를 형성하는 바로 그것이며, 의무는 그 가치가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의 조건이므로, 여타의 모든 동기는 이 의무에게는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96~97쪽) 


 2. 보편적 의욕 원리의 확장- 자살 금지의 의무, 자기 곤경에 기인한 약속의 금지 의무, 자기 재능의 방치 금지의 의무,  타인의 역경에 대한 냉담함의 금지 의무 (이하 133~138쪽에서 발췌)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보다 다른 종류의 의무들에로 확장시킵니다. 이 예들은 모두 현실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 준칙들(maxims) 이 어떻게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에 근거하는, 자기 준칙의 보편적 의욕의 원리와 상충될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1)  해악에 잇따라 절망에까지 이르러 생에 염증을 느낀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자살하는 것이 가령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하고 자문할 수 있는 한에서는, 아직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행위의 준칙이 실로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 그런데 그의 준칙은, '나는 만약 생이 연장되는 기간에 쾌적함보다는 오히려 해악을 가져올 위험만 남아 있다면, 자기 사랑에서 차라리 생을 단축하는 것을 나의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물어져야 하는 것은, 과연 이 자기 사랑의 원리가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때 사람들이 이내 알게 되는 바는, 그 사명이 생의 촉진을 추동하는 바로 그 감각이 생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연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연은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저 준칙이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모든 의무의 최상의 원리와 전적으로 상충한다는 사실이다..

 2) 돈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곤경에 놓인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정해진 시간에 갚을 것을 확실하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한 푼도 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는 그러한 약속을 할 뜻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에 그러한 방식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고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자문하는 정도의 양심은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의 준칙이 되며, 그 내용은 '만약 내가 돈이 없는 곤경에 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돈을 빌리면서 갚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비록 내가 돈을 갚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 된다. 무릇 이러한 종류의 자기 사랑 혹은 자기 편함의 원리는 나의 전 미래의 안녕과 어쩌면 잘 합일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사랑의 요구를 보편적 법칙으로 변환시켜, '만약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된다면, 사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세운다. 그때 나는 이내 나의 준칙은 결코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타당할 수 밖에 없고, 자기 자신과 합치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자기 모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누구든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것을 지킬 결의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법칙의 보편성이 되면, 그것은 약속 및 사람들이 그와 함께 갖는 목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에게 약속된 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런 모든 거짓된 말들을 허황된 구실이라고 조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사람은 약간만 개발하면 온갖 관점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환경에 있어서 자신의 행운의 소질을 확장하고 개선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쾌락에 몰두하는 것을 우선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천부의 자질을 방치하는 자신의 준칙이 오락 자체를 향한 그의 성질과 합치하는 것 외에, 사람들이 의무라고 부르는 것과 과연 합치하는 지를 묻는다. 그때 그는, 비록 인간이 자신의 재능을 녹슬게 내버려두고 자신을 한낮 안일과 오락과 섹스, 한 마디로 향락에 바치려 한다 해도 자연은 그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언제나 존속할 수는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거나 또는 우리 안에 자연적인 본능으로서 심어지는 것을 도저히 의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그에게 온갖 가능한 의도들을 위해 쓰도록 주어져 있으므로, 이성적 존재자로서 그는 그 안의 모든 능력이 발전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이다.  

 4) 자신의 일이 잘 되어 가는 네번째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큰 역경과 싸울 수 없음을 보면서, (그가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각자는 하늘이 의욕하는 바대로, 또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을 것이고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의 안녕을 위해서나 그의 안녕을 위해서나 그가 곤경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인가 기여할 흥미가 없을 뿐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된다고 해도 인류는 능히 존속해 나갈 수 있을 터이다. 아니, 의심할 여지가 없이, 남을 속이고 인권을 훼손하는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잘 존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저러한 준칙에 따라 보편적 자연법칙이 잘 존속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원리가 어디서나 타당하기를 의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을 결의하는 의지는 자기 자신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가 그 자신의 의지로부터 생겨난 그러한 자연 법칙으로 인해 그 자신이 기대하는 도움에 대한 모든 희망을 스스로 앗아 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칸트 자신의 정리

 ..이렇듯 무릇 많은 현실적인, 적어도 우리가 현실적으로 간주하는 의무들 중의 몇 몇은 이러한 원리들에서 도출된다고 함은 명백하다. 사람들은 우리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행위 일반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규준이다. 몇몇 행위들은 그것들의 준칙이 모순 없이는 결코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생각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도저히 그런 것이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의욕할 수 없다. 다른 행위들의 경우에는 저 같은 내적 불가능성이 마주쳐지지는 않지만, 역시 그것들의 준칙이 자연 법칙의 보편성으로 승격되기를 의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의지는 자기 자신과 모순 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엄격한 내지 엄밀한 의무에, 후자는 느슨한 의무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쉽게 보여진다..이로서 모든 의무가 그 행위의 객관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책무의 종류와 관련해서 앞서 말한 유일한 원리에 의존한다는 것이 이 실례들에 의해서 완벽하게 제시되었다. (137~8쪽) 


 4. 짧은 코멘트
 
  칸트는 여기서 완전한 의무(즉 자살 금지 의무, 거짓 약속의 금지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자기 재능의 방치 금지의 의무, 타인의 곤경에 냉담하지 않을 의무)를 분류합니다. 칸트는 완전한 의무에서 <자살의 보편화>와 <자연의 자기 유지의 법칙>과의 모순 관계, 그리고  <거짓말의 보편화>와 <약속이라는 사회의 자연적 관행>과의 모순 관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그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하는 일이 올바른 일인가를 고려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보편적으로 상정된 상황(의욕된 상황이 아니라) 자체가, 그것이 자연과 사회의 존립 근거자체를 붕괴시키는 일' 에 속합니다. 좀 추상적인 진술이 되어 버렸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살이라는 자기 준칙'을 실행해 버리면, 그 사회를 이루는 생물학적인 기초는 없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 혼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편의에 따른 거짓말이라는 자기 준칙'을 실행해 버리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의사소통에 기반한 모든 행위들의 규범적인 기초는 없어지게 됩니다. 자기 준칙의 보편적인 실행 결과가 사회의 파괴로 나타나게 되는 이 두 가지 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규범, 핵심적 의무가 맞닥 뜨리는 한계 상황으로서의 무의미입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추론을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자살 금지와 거짓말 금지의 의무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직접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반대항이 보편화된 결과가 규범의 존립 조건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무의 반대-즉 자살과 거짓말의 보편적인 실행-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의무의 반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 즉 규범 자체가 아니라, 규범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조건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준칙의 보편적 실행을 의욕하는 일이 유의미 해지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부류의 불완전한 의무에 와서 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그것의 보편적인 실행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지는 않으나 이성적 존재자라면 결코 의욕할 수는 없는 두 가지 예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재능을 녹슬지 않게 발전시킬 의무와 타인의 곤경에 냉담하지 않을 의무는, 각각 그 의무가 보편적으로 부정되더라도 사회의 자연 법칙에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즉 그 사회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이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윤리적인 주체는 그것을 사회의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1) 모든 이성적인 존재자는 자신 안의 능력이 필연적으로 발전되는 것을 의욕하기 때문이며, 2) 경우에 따라 그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은 자신이 기대하는, 필요할지도 모르는 타인의 도움에의 희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으로서, 이성적 존재자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이 논변은 순환 논변입니다. 첫번째 의무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 안의 능력이 발전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에 자기 재능을 발전시킬 의무를 가진다'  로 바꿔 쓸 수 있으며, 두번째 의무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받을 희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욕하지 않기 때문에 역경에 빠진 타인에 냉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진다' 라고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자신 안의 능력이 발전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한다', '(자신이 역경에 빠졌을 때) 타인의 도움을 받을 희망을 스스로 포기 하지 않는다'는 칸트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내용으로서 미리 규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이미 이성적 존재자에게 포함되는 특정한 의지를 규정한 후,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의욕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가 '이성적 존재자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이러한 의지의 내용을 곧 이성적 존재자가 지켜야 할 의무로 정립' 한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말해 '(이성적 존재자인) 내가 그것을 (필연적으로) 원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 이상하지요?)

 
의무를 근거짓는 칸트의 논증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결국 칸트의 논변에 함축된(혹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어떤 무의미에 맞닥뜨리게 되는 감을 저는 지울 없습니다. 칸트 윤리학의 논변에 대한 유력한 종래의 해석(제가 보기엔 월드님이 표명하고, 제가 종래에 가졌던 입장 설득력에 기본적으로 수긍을 하면서도, 칸트 윤리학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필요성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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