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추억

- 드라마의 정치학, 그 피상성에 대하여


드라마가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신화, 전설, 도시괴담 등도 의외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있는 경우가 많다. 신화나 일화를 해체하면 그 안의 추악한, 혹은 어리석은 정치의식이 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어렸을 때 난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를 즐겨 봤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중 두가지 에피소드가 잊혀지지 않는다. 왜 이 에피소드가 내 기억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어린 내가 보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중 하나는 수사반장의 에피소드다.

한 여자가 남편을 살해한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한 여자다. 그래서 판사의 동정을 사고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수사반장 최불암은 뭔가 석연치 않다는 낌새를 눈치 채고 집요하게 사건을 수사한다. 마침내 밝혀진 진실은 그녀가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는 것은 거짓이고 남편을 살해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연기였다는 것이다. 최불암은 진실을 밝혀내고 간악한 살부녀를 일급살인혐의로 다시 법정에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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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DVD로 출시된 추억의 드라마 수사반장, 몇몇 에피소드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수사반장이 실화를 바탕으로 극본이 쓰여 진다고 봤을 때 과연 저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남편은 정말 그 여자를 전혀 폭행하지 않았고 그녀가 모든 것을 꾸며 낸 것일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살해라는 심정적 괘심죄를 가하기 위해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한 사건 아니었을까? 어린 나이에 그 드라마를 봤지만 난 그 드라마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마 아직도 내 뇌리에 그 드라마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다른 에피소드는 ‘한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의 에피소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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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붕 세가족의 이미지 찾기가 너무 어려웠음. 최장수 드라마로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의외였음>


이 또한 가정폭력을 주제로 다루었다. 그 동네에 매일 같이 아내를 패는 남자가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동정하지만 잠시 후면 아내의 정체가 드러난다. 남편에게 매일 거짓말을 하고 맞고 난 뒤에도 곧 새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화장을 떡칠하고는 외출을 하고 쇼핑을 한다. 결론은 그 여자는 맞을만한 여자라는 것이다.


그 드라마를 볼 때에는 아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쯤 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분명하게 그 드라마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아내를 때려야할 만한 죄가 어디 있고 맞아야 마땅한 여자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 드라마는 틀림없이 당시에 만연한 가정폭력을 부추겼을 것이다.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었으니까.


정작 궁금한 것은 왜 당시에는 이 말도 안되고 불온한 사상을 담은 드라마에 대해서 시청자의 항의가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토록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드라마를 버젓하게 공중파로 방영해도 될 만큼 우리나라사회는 잔인한 곳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드라마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경찰에 잡혀가는 시위대는 그럴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문당하는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만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간도 많았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죽어가는 농민들을 보며, 홍콩에서 시위하다가 구속된 농민들을 보며 저들은 좌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지 실제의 농민과는 관련 없다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어떤 사람 역시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에게 수도 없이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의 홍수들. 비판 없이, 필터링 없이 그 표피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피상물의 세계, 본질은 없는 세계에 살게 된다. 그 세계가 바로 시뮬라시옹이다. 그리고 그 시뮬라시옹를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들 자신이 시뮬라시옹이 되어 시뮬라크르의 구성인자가 되어 버린다.


피상적인 세계를 세상의 실재로 믿고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피상물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세계에서 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과 토론을 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세계에서 이미 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고계, 이미지계에 덧칠해진 이미지가 소중할 뿐.


그래서 노빠라는 기표도, 깨인 시민이라는 기표도 이미 본질을 떠나보내 버린 공허한 울림처럼 여겨질 뿐이다. 오늘도 어떤 시뮬라크르의 피상성에 열받는 나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피상성을 깨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니 감정적인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신자유주의시대의 감정경제학에 걸맞는 처사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비판을 아끼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비판은 언제나 본질을 향해야 한다. 본질을 떠난 비판은 그 자체가 시뮬라시옹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