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좀 자극적인가요?

요즘 임시정부 수립 100년 관련 프로그램이 KBS에서 집중적으로 방송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해서 그런 방송을 할까요? 저는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남한과 북한의 정통성 논쟁에서 정통성의 기반을 임시정부에서 찾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공통이고 해방 전후의 남한과 북한의 정부 수립과 관련되어 북한이 정통성이 더 있다....라는 것이 최소한 진보진영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이 무너지고 북한의 김일성 도당은 스탈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NL/주사파들의 논리가 깨지고 와해되어 이제는 정의당처럼 '정치 낭인 신세'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이를 부인하며 암약하는 NL/주사파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혼자 내뺐을 뿐 아니라 그 전쟁 와중에서도 사사오입 개헌으로 불리는 권력에만 몰입했던 이승만에 대한 혐오를 하지만 이승만이 아니면 대한민국은 건립이 안되었을 것이라는 저의 주장은, 철없는 이상주의자였던 김구도 이승만만큼이나 혐오의 대상입니다. 저는.


각설하고,

그런데 전쟁사를 읽다보면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인도군의 참전은 이상한 양태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간디는 비폭력저항을 주창하면서 영국은 인도에서 군인을 일으켜 참전해달라고 주문했으니까요. 그걸 간디는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에서 인도군은 떄로는 영국에 협조하면서 때로는 영국의 반대편, 즉 일본에 협조하는 기록들이 있었으니까요.

뭐, 전쟁이라는 것이 영원한 아군도 없고 영원한 적군도 없으며 특히 용병형태이던 인도군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최근에 '수바스 찬드라 보스'라는 실질적인 인도를 독립시킨 인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의 진짜 독립 영웅은 간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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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에 협력하며 유라시아를 동분서주했던 그 인도군(Indian Army)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군(India National Army)'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에 무력으로 도전했던 또 다른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미얀마를 거쳐 벵골로 진입해 콜카타를 점령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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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도국민군의 지도자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이다. 인도의 제2차 세계 대전사를 복기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40도를 넘어 50도까지 치오르는 남국의 열기를 뿜어냈다. 격정적이고 격렬했다. 감정적으로 가장 몰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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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은 여기를 클릭)


그러나 간디는 우려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소련이나 독일에 접근하기보다는 대영제국의 품에서 자치를 확대해가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사회주의적 근대화'에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지하듯 간디는 근본주의자였다. 산업화와 근대 문명 자체에 비판적이었다. 자립 경제와 마을 자치만이 인도가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간디와 보스의 불화는 노선차이라기보다는 기질 차이가 더 컸다. 네루 또한 소련식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다만 네루는 간디에 고분고분했다.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히는 편이었다. 대장정 이후 마오쩌둥처럼 소금 행진 이래 간디는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누렸다.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네루 또한 자신을 간디의 충복이자 후계자로만 생각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보스는 솔깃했다. 그토록 고대해마지 않던 대영제국의 난국이 닥쳤다며 환호했다.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줄을 이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고 했다. 독일 전차 부대의 영국 상륙이 임박했다고도 했다. 

인도 역시 때를 맞춤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여겼다. 국민회의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여전히 간디였다. 그의 거처를 찾아가 무장 봉기를 일으키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간디는 거절했다. 그러기는커녕 영국을 도와 파시즘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보스는 간디의 독선(獨善)에 깊이 절망했다. 

게다가 1940년 7월 또 다시 투옥된다. 인도 총복부가 보스의 봉기 낌새를 포착한 것이다. 이번만은 보스가 간디를 따랐다. 간디처럼 죽자 살자 단식 투쟁에 나섰다. 보스 역시 두 차례나 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옥중 아사는 총독부로서도 난처한 사태였다. 결국 가택 연금으로 방침을 바꾼다. 그 틈을 이용하여 대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인도 정부로서도 외면만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간 세 차례나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1956년, 1970년, 그리고 2006년이다. 처음 두 보고서는 대동소이하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 사실이며, 생존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세 번째 보고서가 미묘하다. 위원회가 조직된 해가 1999년, 인도인민당(BJP)이 여당이었을 무렵이다.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있다. 비행기 사고는 연합군, 특히 영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일본군이 꾸며낸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 모셔진 유골 또한 보스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보스가 언제 죽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제출된 2006년에는 재차 국민회의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국민회의 정부는 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다. 인도국민군과 보스가 부각되면 될수록, 인도독립운동사에서 국민회의와 간디-네루가 누리던 독점적인 위상에 흠집이 가기 때문이다. 보스의 최후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벼룩론과 같이 민중의 삶은 도외시하고 자신의 프로파간다만을 관철시키려 했던 간디가 과연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들 자격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세계 4대 성인이라는 용어가 '세계 10대 OOO' '세계 3대 OOOO' 등 서열짓기를 좋아하는 일본의 한 학자의 창조물이고 서양에서는 세계 4대 성인? 그게 뭥미? 하는 입장이지만 이 세계 4대 성인 선정은 메이지 시대의 '유럽에 대한 열등감' 및 '탈아입유'를 꿈꾸던 일본이, 서양에 고분고분한 사람들이나 일본에 도움이 된 사람들을 세계 4대 성인에 넣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주사상이 이황의 주기설이고 그 주기설은 족보 상 공자입니다. 그리고 세계 4대 성인 선정 당시 석가모니를 뺴고 칸트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칸트의 사상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철학의 바탕이었던 것처럼 당시 철권정치였던 메이지에게는 딱 맞는 기호품이 바로 칸트 사상이었을겁니다)


간디에 대하여 너무 모욕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민중을 위하기는 커녕 자신들만의 호의호식만을 탐하는 풍토, 그리고 그 풍토가 현대에 이르러 극도로 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망가지고 효용가치가 더 이상 없는 사상들을 가지고 '사상놀음'만 하여 국민을 점점 궁지로 몰고 있는 현실이 너무 참담해 간디가 먹어야 할 욕보다 더 많은 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