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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떡밥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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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때문에 조선이 독립을 했다는 것은 몇 번 거론을 했고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를 존중했던 장제스는 만주 등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는 처칠에 대하여 이렇게 혹평을 하고 있다.
‘놈(처칠)은 전형적인 영국식 앵글로 색슨 인이다. 사상이나 정신적 기백, 인격에 이르기까지 루스벨트와는 동렬에 놓고 논할 수 없는 인간이다. 속이 좁고(狹隘), 교활(浮猾)하며, 이기적이고(自私), 완고(頑固)하다는 여덟 개의 한자로 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11월 25일)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장제스가 민족자결권을 중히 여겼고, 동양 민족의 상황에 맞게 전후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카이로 회담이 있기 전까지 미국과 영국은 조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흔적이 없다. 그러한 미국과 영국이 동양의 문제에 관해서는 장제스의 의견을 듣고, 장제스의 주장을 수용하게 한 것은 장제스의 공(功)이다. 이 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의제로 집어넣어 조선의 완전 독립을 주장해 그 틀을 마련한 이는 장제스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이로 선언문(三國公報)을 이끌어 낸 경과에 대해서는 기록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성명 문안에 대해 토의하고 있을 때 영국은 조선 독립 문제를 성명문에 넣어서는 안 된다며 완고히 주장했다. 동북(만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만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영국은)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는 문제에 한해서는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 대표가 미국의 협조를 얻은 덕분에 이런 내용이 선언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11월 30일)
카이로 선언은 그 후 국제공약으로 이행됐다. 1945년 7월 26일자로 발표한 ‘포츠담 선언’ 제8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그대로 이행된다’고 명기한 것이다. 덕분에 한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寂易騷"를 남기고 간다.
2018.11.12 13:06:25
비록 장개석이 독재자이고 실책이 많았던 사람이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호의적이었고 그 독립과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많이 주었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나이 많은 분들 중에서는 "예전에 장 총통께서 말이지..."하며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 많아요.
솔까말 만보산 사건 이후에 중국에서 "조선인에게 보복하자"는 분위기가 조금만 일어났다면 무시무시한 피바다가 펼쳐졌을테고... 우리나라가 은혜를 조금만 알았더라도 대만과의 단교를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하지도 않았겠죠.
2018.11.12 15:05:39
하하하님/대만이 일본이 대만과 단교했을 때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물론, 대만은 우리나라식 식민지근대화론이 참이어서 일제가 대만을 발전시킨 것이 대세라는 분위기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YS정권 때 대만과 단교하자 대만의 반한감정은 극도로 치솟았었죠. 뭐, YS의 무식함이야 따로 말할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장개석이 대한민국에 호의를 가진 것은 포츠탐 회담에서의 주장들에서도 보듯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복귀를 꿈꾸었기 때문이었을겁니다. '일본의 천황제도도 유지시키자'라고 주장을 했으니까요. 물론, 근본적으로는 호의를 가졌겠지만 종주국으로서의 졸개국가에 대한 시혜라고 할까?
2018.11.12 13:18:20
처칠은 대영제국 총리대신으로서 대영제국 해체의 단초가 될지도 모르는 식민지 독립 보장에 당연히 소극적이었고,
장개석은 조선이 이른바 "독립"하기만 한다면 이천년 넘게 이어온 지나의 중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간단한 셈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승만과 면담한 엘레노어의 의견에 따라 장개석 손을 일단 들어줍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내심은 다른 것이었으니, 장개석을 따돌리고 셋만 만난 얄타 회담에서는 "대일본제국" 분할에 나섭니다. 노른자(일본 열도)는 미국이, 흰자(만주)는 소련이, 알끈(조선반도)은 미국과 소련이 사이 좋게, 양분합니다.
이 흥정이 서로에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차지함으로써 서태평양 전체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고, 소련은 광대한 새 영지를 얻었으므로 당분간은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끈으로 전락한 조선 인민들에게 그것은 일찌기 겪어본 적이 없는 민족적 재앙의 non-refundable 예약이었습니다. (이 재앙에 비하면 차라리 일제시대는 요순 시절 아니었을까요?) 한반도의 배후에 엄청난 어린진을 구성한 소련이 그것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으니까요. 그 어린진의 첨두는 곧 나타날 터이었습니다. 조금 다른 의미로의 도궁비현(圖窮匕現)이겠습니다.
장개석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죽쒀서 남 준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격이 됩니다. 백인들의 세상이었니까요. 뭐 개평은 있었군요, 대만과 팽호 열도라는. 그것이 나중에 장개석의 구명 보트가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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