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어떻게 ‘사람’이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 그 앞 구절은 더 놀랍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로마 14,7). 영

화 ‘바울(Paul, Apostle of Christ, 2018)’은 생사를 뛰어넘어 진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는 위대한 인간의 몸짓 그 언어로 우리를 압도한다. 그래서 스크린에서 바울의 땀과 피 그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니체 덕분에 내겐 애증의 존재였다. 니체는 바울을 예수의 가르침 곧 기쁜 소식 그 복음(福音)을 나쁜 소식, 화음(禍音, Dysangelium)으로 전도시키며 예수운동을 예수 종교로 만들어 기독교를 망친 자로 매도하였는데, 젊은 시절 한 때 니체에 빠졌던 내가 바울에 대해 편견을 지니게 되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신학적 눈길이 공관복음서에서 바울의 편지들로 옮겨지면서 그 애증은 다른 차원에서 깊어져 갔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가 말한 대로 자기고백으로 철철 넘쳐나는 바울의 편지들, 그런 인간적인 자기고백 속에서 나는 벌거벗은 바울 그 아픔을 느꼈고 그 아픔 속에서 내 영혼과 그 영혼은 교감되었다. 내가 영화 ‘바울’을 굳이 보려고 했던 것도 그런 애틋함 때문이었다. 그럴 때 애증이란 단어는 그 애틋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말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다’라는 말이 그 마음을 온전히 나타내주고 있다. 그렇게 바울은 내게 미운정 고운정 다 든 존재였다.

영화는 AD 67년경, 사도 바울의 생애 마지막 시기를 그리고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는 예술적 광기로 스스로 저지른 로마시 대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심이 높아지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애꿎은 범인으로 몰아가면서 극심한 박해를 한다. 여기에 신흥종교 그리스도교의 실질적 리더로 알려진 사도 바울은 체포당해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고, 바울의 동역자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박해의 칼날 아래 희망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의 지혜를 전하고자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지하 감옥 속으로 바울을 찾아온다.

거기에서 박해의 채찍에 흔들리는 분열의 위기에 처한 로마교회의 실상을 전하며 혼란스런 자신의 심정을 바울에게 밝히지만, 바울은 예의 코린토 편지(1코린 13,1~13)의 ‘사랑 노래’로 루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서 티모테오 편지와 같은 편지들을 대필시킨다. 여기에서 사랑 노래를 부르는 바울과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며 교회 박해에 앞장섰던 젊은 시절의 사울이 오버랩하는 장면은 가슴을 젖게 만든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사울은 어떻게 예수의 말씀이라고 확신한 것일까. 어쩌면 사울에서 바울로의 탈바꿈 그 회개는 박해자로서의 자신의 끔찍한 모습에 대한 자기혐오의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거듭난 바울의 필생 좌우명은 ‘사랑만이 유일한 길이다(Love is only way)’. 과연 그러한가. 현실 속에선 박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희생 역시 끊임없이 뒤따른다. 어쩌면 사랑의 길은 현실과 무관한, 바울이 코린토 편지(1코린 7,29~31)에서 말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 루카에게 던진 “그들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야.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길이야.”라는 말은 바로 그 초월과 내재가 함께 하는 사랑의 길 그 현묘한 음색을 말함일 것이다. 그 사랑의 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프리스카의 “우리가 이 도시에 남아있는 유일한 빛이다.”라는 고백대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만이 유일한 길이다(Love is only way)’.

나는 물론 천국을 시공간의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참수 당해 천국에 간 바울이 사울 시절 자신이 죽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포옹하는 장면도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드는 감동의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