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교회 장로의 분노

우리 회사 옆에는 제법 큰 교회가 있다. 매머드급의 교회는 아닌데, 중소교회 치고는 제법 크고 반듯한 규모의 건물을 갖춘 그런 교회다. 목사님은 흔히들 말하는 개독과는 달리 다소 합리적인 설교를 하시는 분이고 이웃 사촌이다 보니 서로 왕래도 있고 인사도 주고 받고 사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수요일 저녁에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교회 주차장 입구를 떡하니 왠 차가 가로막고 주차해 있는데 혹시 우리 회사 관련 차량아닌가 확인 좀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만에 하나 그렇다면 큰 실례가 되므로 내려 가 보았다.
헉, 아닌게 아니라 왠 폭스바겐 골프 한 대가 교회 주차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주차해 있는 게 아닌가? 연락처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몹시 난감 했다. 그 때, 그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큰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이거, 이거, 아주 질 나쁜 놈이야. 이거, 우리 한번 골탕 먹어 보라고 일부러 여기를 막아 논 거야. 의도적이라고. 우리 엿먹이려고 이렇게 차 세워 놓은, 아주 나쁜 놈이야. 이 새끼를 잡으면 가만 두면 안돼."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 분을 잠시 쳐다 본다. 목사님이 내 표정을 보더니 얼른 장로를 말리기 시작한다.

"아, 장로님, 뭐 누가 일부러 그랬겠어요. 잠시 차 세우면 되겠다 싶어서 세웠는데, 막상 들러서 일보다 보니 일이 길어지고 있는 거겠죠."

"아니, 목사님, 그런 게 아니에요. 이놈이 우리 엿 먹어 보라고 일부러 여기 세운 거죠. 이거 정말 질 나쁜 놈이에요.  잡으면 절대 그냥 두면 안됩니다."

우리 회사 경비가 나와서 번호판 조회 해 보고 회사 야근 직원들과 연락 해보니 우리 회사 방문 차량은 아닌 거 같다는 내용을 전달 한다. 거기까지 이야기 듣고 나는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 해 본 결과, 근처 다른 회사 사무실을 방문한 그 차주가 사무실에서 주는 술 한잔 받아 먹느라 시간이 흘러 버렸고 결국 나와서 부랴 부랴 차 몰고 도망갔다고 한다. 

2. 진화심리적 인식 모듈 가설 - 그래, 모든 것은 의도적인 것이야.

위 에피소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인간은 사소한 사고에도 흔히 그 사고 당사자가 의도적으로 사고를 내지 않았냐고 악의를 품는 경우가 있다. 차가 후진을 하다가 가벼운 사고를 냈는데 피해자가 따지면서, 당신, 보고도 일부러 온 거잖아! 이렇게 고함치는 경우를 몇 번 본적이 있다. 그 운전사가 미친 인간 아닌 다음에야 일부러 사람을 치기 위해 후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면서 고의적으로 사고 낸 거 아니냐고 힐난 하는 걸까?

인간의 인식장치는 어떤 사고에 대해서도 그 안에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사고하려는 경향이 있다. 데보라 켈리먼(Deborah Kelemen)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연구를 하였고 아이들은 모든 것을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관찰한다. 나무는 의자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고, 구름은 비를 위해 만들어 졌으며 사자는 동물원에 가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식이다. 그녀는 이 관찰결과를 확장하여 인류는 발전 초기부터 이런 식으로 자연물을 인식하였고 이런 사고방식이 인류의 자연인식과 적응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그녀는 "무조건적인, 혹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식의 목적론 promiscuous teleology" 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의 인식 모듈은 어떤 현상 이면에는 이 현상을 의도한 행위자가 있다는 식의 인식을 유도하는 장치가 있다. 저스틴 배럿(Justin Barret)은 이런 인식장치를 행위 감지기(Agency Detection Device)라고 명명한다. 물론 이 장치는 대단히 유용하다. 갑자기 나무가 흔들릴 때 그 이면에는 적들이 숨어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 보다는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장치가 때로는 대단히 과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도적인 행위자가 없는 현상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작동하여 그 이면에는 의도적 행위가 있다고 판단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이 장치를 다시 과민성 행위 감지기(Hyper-Active Agency Detection Device)라고 부르게 된다.

위 진화심리학적 인식 모듈은 모두 종교현상이 어떻게 인류의 진화와 관련성을 가지는 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존 티한이 진화심리학적 가설을 세우면서 수집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이 가설은 첫 에피소드에 등장한 그 교회 장로의  행동에도 적용가능하다. 누군가 차를 주차했는데 그 행위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 그는 10만년 전 사고를 현재에도 하고 있다.

우연히 어떤 사고나 상황이 발생하고, 그 사고나 상황이 본인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그 현상과 상황을 즉시 어떤 목적을 가진 행위자가 저지른 일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처벌하고자 한다. 그 상황이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할 경우 분노가 일지 않거나 가볍게 일어나지만 상대방이 악의적으로 이 일에 개입하고 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강력한 분노가 유발된다. 그리고 공격성을 촉발 한다.


3. 노무현과 친노에 대한 진보진영과 (어떤)런닝맨의 인식

노무현은 지역갈등를 해결하겠다면 그 일차적 과제를 영남에서의 의석확보에 두었다. 그래서 열린당의 전국정당화를 통하여 지역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원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완전히 망했다. 

남은 것은 이 완전지 망한 결과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진보진영의 입장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충 아래와 같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가. 원래 한계를 가진 보수 정치가다.
나. 지역문제는 애초 일차적 우선과제가 아닌데 이를 자신의 우선과제로 설정한 거 부터 문제다.
다. 지역주의는 원래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 많이 해소 되었으며 호남차별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문제일 뿐이다(박상훈).
라. 진정성은 있었으나 방법과 우선과제 선정이 틀렸으므로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럼 일부 런닝맨들은 노무현정권에 대한 평가가 어떤가?

가. 그는 영남패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지역문제를 들고 나왔다.
나. 한나라당의 영남패권주의를 빼앗아와 친노중심의 영남패권주의를 완성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다. 이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호남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배신했다. 
라. 결과적으로 노무현/친노 세력은 전두환과 동급으로 나쁘거나 더 나쁜 인간들이며 지금 새누리당 보다도 사악한 우선 척결대상들이다.

이런 인식차이가 왜 발생할까? 한 런닝맨들은 진보진영은 피해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 아픔을 모를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 런닝맨도 위와 같은 (일부)런닝맨들이 말하는 해석에는 반대한다.  실제로 호남의 많은 분들도 위와 같은 인식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호남에는 노무현지지자가 많다. 위의 인식을 가지고 있는 런닝맨들에게는 이들은 "호구"라서 그렇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히 이용당하고도 친노를 지지하는 것은 이들이 어리석은 호구라는 증거로 보인다. 

문제는 노무현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호남을 배신하고 호남을 차별하고, 영남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역주의해결을 자신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일까? 여기에 그렇다고 답변할 때,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솟구칠 것이다. 노무현이 단순히 의도하지 않은 실패자라고 규정할 때는 그의 실패의 원인과 요인을 분석하기는 해도 그의 "악의성"에 대한 증오는 솟구치지 않을 것이다.

자, 노무현이 교회 앞에 차를 주차해둔 싸가지 없는 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 보자. 일부 런닝맨들은 그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것이 옳바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도적으로 호남을 엿먹이기 위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니까. 

이제 더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자. 어떤 관점이 보다 사실에 가깝고 생산적인 논의를 가져 올 수 있냐는 질문.
노무현을 지지하는 호남의 많은 대중들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직 그를 지지하는 걸까? 그들은 아마 노무현의 시도를 "선의"로 해석하고자 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의 행위는 선의도 악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생각한 목적에 부합되는 선택을 한 것이고 그 목적의 우선 순위과 그가 선택한 방법론이 우리의 생각과 달랐던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이전 정권의 지도자 보다는 나았지만 100%깨끗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식모듈은 여전히 10만년전의 그것과 동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종교는 유지되고 사고가 발생하면 상대방의 악의를 의심한다. 우리집 앞에 차를 주차한 인간은 나를 엿먹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므로 그에 대하여 분노하고 증오를 품는 것은 너무다 당연하다. 그 분노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인간은 아마도 10만년 전의 삶에는 잘 적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장치로 인하여 인간의 생존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니까.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고 상황도 바뀌었다. 무엇이 더 합리적인 판단인지 고려 해 볼 만큼 인류의 이성도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