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론에 대해서 참 많은 말들이 오갔죠. 이게 호남의 투표를 계급투표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나온 말들인데 일반적으로은 통용되지 않는 개념을 일방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니 논지에 무리가 갑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계급론이 다 맞다는 말이냐?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맑시즘에서 주장하는 계급론은 물론 비판 받을 구석이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습니다. 경제결정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초기에도 나왔고 이후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톰슨(E.P. Thomson)의 저작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었죠. 톰슨은 상부구조(문화, 도덕 등의 영향력)이 결코 토대의 영향력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개진했고 심지어 토대와 독립적으로 유지되며 토대의 형성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를 함축했습니다. 이는 나중에 중국과 북한의 도덕경제론이라는 이론으로 확장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추후 마르크스 계급론에 대한 신좌파의 비판이론은 따로 시간이 있으면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일전에 홍세화의 컬럼에 대하여 비판 한 글을 올려 논의를 조금 풍부하게 하고자 합니다.

序 - 내 멋대로 정치경제


요즘 정치 경제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분명 멍청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람시도 유행이 지났고 알튀세르는 한참동안 비판받았고 톰슨 역시 바보취급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정치경제학을 잊지 않기로 했다.

결국 이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은 이 사회를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올바른 답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도구 없이는 우리는 바른 답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 

요즘 같은 처지에 새로운 개념을 익히고 파고든다는 것은 무리다.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공부한다고 밥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거칠게나마 이곳에 정리해두려고 한다.

정리해 두는 것만으로 틀림없이 내 사고의 도구는 예리해 질 것이다. jiva님 과 같이 명민한 분들이 오류를 지적해 주실테고 그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기록의 가장 원초적인 역할이 바로 기억이니까.


1. 홍세화와 수요편지


홍세화가 만든 유행어의 대표는 똘레랑스다. 하지만 그가 만든 유행어는 그 밖에도 또 있다. 한겨레 신문에서 기획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홍세화는 수요일마다 수요편지를 보내면서 ‘젊은 벗’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중 가장 널리 읽힌 것이 아마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라는 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말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명제다. 마르크스는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일반과정을 규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The mode of production of material life conditions the general process of social, political and intellectual life.It is not the consciousness of men that determines their existence, but their social existence that determines their consciousness.”라는 말을 했고 이말은 흔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는 문장으로 약식화 되어 사용된다.



2. 사회적 존재? 사회적 동물?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존재’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따라가면 사회적 존재는 생산관계 relation of production 을 의미하거나 생산관계를 포괄하면서 생산양식 mode of production에 포함된 의미의 용어다. 생산양식은 생산력 productive forces 과 생산관계 relation of production 의 통일, 특히 사회의 역사적 발달 단계에서의 결합형태를 의미한다.


말이 점점 어려워진다. 생산양식이라는 말은 그냥 각 사회의 경제적 형태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해 해 두자. 흔히들 이야기하는 노예제, 봉건제, 산업자본주의, 사회주의등등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생산력은 그 사회의 재화생산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산관계는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자가 생산도구(이 두 가지가 합혀진 의미가 생산력이다)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게 되고 생산된 재화가 어떤 형태로 분배되는가에 대한 정의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생산관계는 사회적 계급시스템을 뜻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노동자, 자본가, 자영업자 등등의 계급, 그리고 그 계급간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언급하는 단어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마르크스의 주장을 좀 더 분해해 보자. 생산양식은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일반 과정을 규정한다고 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토대 basis(혹은 물적 토대 material basis, 흔히 하부구조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basis는 토대라는 번역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용되는 토대는 생산관계의 다른 말이다. 그 사회의 정치, 문화, 종교 등등의 모든 상부구조는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당한다는 것이 정통 맑시즘의 교의다.


사회적 존재=토대=생산관계로부터 그 사회의 정치,경제, 문화는 규정당한다. 사회적 의식? 사회적 의식은 상부구조의 일환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로부터 당연히 규정되기 마련이다.



3.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방법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왜? 의식은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 아닐까?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하게되고 자본가는 자본가계급의 경험을 하게 된다. 전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정신세계를 가지기 어렵다. 결국 개개인은 자신의 경험의 한계내에서 사고하기 마련이며 이런 경험의 차이가 의식을 차이를 가져 오는 것 아닐까?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라면 대부분의 경험은 환금성을 가지는 것이다. 돈을 통해 경험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가계급은 수많은 경험을 살 것이다. 블랙칼라노동자는 자신의 보너스로 몰디브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휴가를 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는 경험을 돈 주고 살 괴짜는 많지 않다. 

그가 '산' 경험은 그에게 자본가다움을, 자본성(資本性)을 의식 속에 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충실한 자본가가 되어 자신의 경험으로 부터 형성된 의식을 합리화 할 것이다.


의식의 대부분은 이런 저런 경험으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또 흔히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사고작용 역시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자신의 경험적 기록을 목록화 한 것이고 기록에서 파생되는 이미지, 또 그 이미지로부터 작동되는 욕망을 합리화하고 실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스티븐 핑커(<빈서판>의 저자)는 우리의 의식은 우리들 자신의 통치권자라기 보다는 대변인에 가깝다고 신랄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프로이트를 싫어하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프로이트와 근접조우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경험의 총체이고 우리 경험은 우리들의 계급성으로부터 규제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식은 존재에 의해 규정당한다는 마르크스의 통찰력은 올바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의식이 어떻게 존재를 배반하나?


문제가 심각하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라면 의식은 존재를 배반할 수 없다. 의식은 존재로부터 규정당하는데 어떻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나타날 수 있나? 물론 정통 맑시즘이라고 해도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은 인정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의식은 얼마든지 존재와 어긋날 수 있고 개개의 상부구조는 개별적으로 존재를 배반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 전체로서의 의식이 그 사회 전체로서의 존재를 배반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지지하지않는 현상이 대규모의 추세로, 장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물론 알튀세로는 경제(혹은 물적토대)는 최종심급으로서만 작동하며 구조 안의 변동성은 산발적인 상황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경제결정주의를 벗아나려 했고 일부 맑시스트는 맑시즘의 인간론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맑시즘은 인간관을 다룬 심리철학이 아니고 최종심급이론을 글자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역시 맑시즘의 기본 틀은 남아있고 문제는 언제가 최종심급이냐는 질문만 하나 더 생겨 난 것 아닐까?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는 심판의 그날이 오면 조정된다는 말 같은데 도대체 그날이 언제란 말입니까 알튀세르 선생님? 최종심급이라는 말 한마디로 이 대규모이자 장기간의 이론적 부조화가 다 용인 될 수 있는 것일까?



5. 시뮬라크르의 시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경험일까? 책을 읽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인간의 경험이다. 그 경험은 어디까지 내 의식을 좌우할까? 생각보다 많이? 생각보다 적게? 적당할 만큼?


우리는 복제물이 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수많은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홍수 위에 살고 있다. 시뮬라크르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들 모두가 진짜야. 니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진짜야. 물론 니가 소비하는 것, 상상하는 것, 꿈꾸는 것 모든 것도 진짜지. 마치 니가 진짜인 것 처럼.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의 노동자들이 가지는 경험은 훨씬 제한 적인 것이었고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허위의식 역시 훨씬 간접적으로 제시되었다. 교회의 성사나 신문이나 책,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그러나 자본가들은 방송사를 가지고 있고 인터넷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사도 가지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입하고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다.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뮬라크르는 시뮬라크르의 정신을 형성한다.


그래서 존재는 의식을 규정하고 의식은 존재를 배반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