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序 - 내 멋대로 정치경제
요즘 정치 경제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분명 멍청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람시도 유행이 지났고 알튀세르는 한참동안 비판받았고 톰슨 역시 바보취급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정치경제학을 잊지 않기로 했다.
결국 이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은 이 사회를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올바른 답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도구 없이는 우리는 바른 답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
요즘 같은 처지에 새로운 개념을 익히고 파고든다는 것은 무리다.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공부한다고 밥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거칠게나마 이곳에 정리해두려고 한다.
정리해 두는 것만으로 틀림없이 내 사고의 도구는 예리해 질 것이다. jiva님 과 같이 명민한 분들이 오류를 지적해 주실테고 그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기록의 가장 원초적인 역할이 바로 기억이니까.
1. 홍세화와 수요편지
홍세화가 만든 유행어의 대표는 똘레랑스다. 하지만 그가 만든 유행어는 그 밖에도 또 있다. 한겨레 신문에서 기획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홍세화는 수요일마다 수요편지를 보내면서 ‘젊은 벗’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중 가장 널리 읽힌 것이 아마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라는 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말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명제다. 마르크스는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일반과정을 규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The mode of production of material life conditions the general process of social, political and intellectual life.It is not the consciousness of men that determines their existence, but their social existence that determines their consciousness.”라는 말을 했고 이말은 흔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는 문장으로 약식화 되어 사용된다.
2. 사회적 존재? 사회적 동물?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존재’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따라가면 사회적 존재는 생산관계 relation of production 을 의미하거나 생산관계를 포괄하면서 생산양식 mode of production에 포함된 의미의 용어다. 생산양식은 생산력 productive forces 과 생산관계 relation of production 의 통일, 특히 사회의 역사적 발달 단계에서의 결합형태를 의미한다.
말이 점점 어려워진다. 생산양식이라는 말은 그냥 각 사회의 경제적 형태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해 해 두자. 흔히들 이야기하는 노예제, 봉건제, 산업자본주의, 사회주의등등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생산력은 그 사회의 재화생산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산관계는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자가 생산도구(이 두 가지가 합혀진 의미가 생산력이다)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게 되고 생산된 재화가 어떤 형태로 분배되는가에 대한 정의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생산관계는 사회적 계급시스템을 뜻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노동자, 자본가, 자영업자 등등의 계급, 그리고 그 계급간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언급하는 단어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마르크스의 주장을 좀 더 분해해 보자. 생산양식은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일반 과정을 규정한다고 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토대 basis(혹은 물적 토대 material basis, 흔히 하부구조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basis는 토대라는 번역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용되는 토대는 생산관계의 다른 말이다. 그 사회의 정치, 문화, 종교 등등의 모든 상부구조는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당한다는 것이 정통 맑시즘의 교의다.
사회적 존재=토대=생산관계로부터 그 사회의 정치,경제, 문화는 규정당한다. 사회적 의식? 사회적 의식은 상부구조의 일환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로부터 당연히 규정되기 마련이다.
3.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방법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왜? 의식은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 아닐까?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하게되고 자본가는 자본가계급의 경험을 하게 된다. 전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정신세계를 가지기 어렵다. 결국 개개인은 자신의 경험의 한계내에서 사고하기 마련이며 이런 경험의 차이가 의식을 차이를 가져 오는 것 아닐까?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라면 대부분의 경험은 환금성을 가지는 것이다. 돈을 통해 경험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가계급은 수많은 경험을 살 것이다. 블랙칼라노동자는 자신의 보너스로 몰디브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휴가를 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는 경험을 돈 주고 살 괴짜는 많지 않다.
그가 '산' 경험은 그에게 자본가다움을, 자본성(資本性)을 의식 속에 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충실한 자본가가 되어 자신의 경험으로 부터 형성된 의식을 합리화 할 것이다.
의식의 대부분은 이런 저런 경험으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또 흔히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사고작용 역시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자신의 경험적 기록을 목록화 한 것이고 기록에서 파생되는 이미지, 또 그 이미지로부터 작동되는 욕망을 합리화하고 실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스티븐 핑커(<빈서판>의 저자)는 우리의 의식은 우리들 자신의 통치권자라기 보다는 대변인에 가깝다고 신랄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프로이트를 싫어하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프로이트와 근접조우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경험의 총체이고 우리 경험은 우리들의 계급성으로부터 규제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식은 존재에 의해 규정당한다는 마르크스의 통찰력은 올바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의식이 어떻게 존재를 배반하나?
문제가 심각하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라면 의식은 존재를 배반할 수 없다. 의식은 존재로부터 규정당하는데 어떻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나타날 수 있나? 물론 정통 맑시즘이라고 해도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은 인정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의식은 얼마든지 존재와 어긋날 수 있고 개개의 상부구조는 개별적으로 존재를 배반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 전체로서의 의식이 그 사회 전체로서의 존재를 배반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지지하지않는 현상이 대규모의 추세로, 장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물론 알튀세로는 경제(혹은 물적토대)는 최종심급으로서만 작동하며 구조 안의 변동성은 산발적인 상황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경제결정주의를 벗아나려 했고 일부 맑시스트는 맑시즘의 인간론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맑시즘은 인간관을 다룬 심리철학이 아니고 최종심급이론을 글자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역시 맑시즘의 기본 틀은 남아있고 문제는 언제가 최종심급이냐는 질문만 하나 더 생겨 난 것 아닐까?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는 심판의 그날이 오면 조정된다는 말 같은데 도대체 그날이 언제란 말입니까 알튀세르 선생님? 최종심급이라는 말 한마디로 이 대규모이자 장기간의 이론적 부조화가 다 용인 될 수 있는 것일까?
5. 시뮬라크르의 시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경험일까? 책을 읽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인간의 경험이다. 그 경험은 어디까지 내 의식을 좌우할까? 생각보다 많이? 생각보다 적게? 적당할 만큼?
우리는 복제물이 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수많은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홍수 위에 살고 있다. 시뮬라크르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들 모두가 진짜야. 니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진짜야. 물론 니가 소비하는 것, 상상하는 것, 꿈꾸는 것 모든 것도 진짜지. 마치 니가 진짜인 것 처럼.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의 노동자들이 가지는 경험은 훨씬 제한 적인 것이었고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허위의식 역시 훨씬 간접적으로 제시되었다. 교회의 성사나 신문이나 책,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그러나 자본가들은 방송사를 가지고 있고 인터넷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사도 가지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입하고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다.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뮬라크르는 시뮬라크르의 정신을 형성한다.
그래서 존재는 의식을 규정하고 의식은 존재를 배반하는 것 아닐까?
간단히 말해 그 주장이 어떤 식이냐면,
""" In the social production of their life, men enter into definite relations that are indispensable and independent of their will, relations of production which correspond to a definite stage of development of their material productive forces. The sum total of these relations of production constitutes the economic structure of society, the real foundation, on which rises a legal and political superstructure and to which correspond definite forms of social consciousness. """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9/critique-pol-economy/preface-abs.htm)
1) 머리 싹 비우고 이 구절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한번 읽어봐.
맑스가 토대(하부구조)를 말하면서 '생산력' 얘기 전혀 안 하지?
맑스가 말하는 하부구조(토대)에서 '생산력'은 안 들어감. 그냥 '생산관계의 총체'가 토대임.
2) 생산력은, 특정 발전단계에서의 "생산관계의 총체"와 상응하는 거임. 토대 아님.
뭐, 이런 식입니다...
뒤에 나오는 시뮬라르크 이야기는 어렵고 모리 아파서...ㅎㅎㅎ 패스.
뱀발추가 : 쓰고 나서 다시 읽으니 제가 코지토님 글을 '대충' 개발새발 읽었네요. 그러나 댓글수정을 굳이 하지는 않겠음.
미뉴에님/코헨의 말은 그냥 교과서적인 마르크스 이론의 해설같아 보입니다. 문장 자체도 마르크스가 한말에 특별한 부분을 덧 붙인 것으로 보이지 않아요.
마르크스이론에서 토대는 생산관계의 총합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코헨은 그 전통적 해석을 그대로 소개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제가 위에서 적었다시피 생산관계+생산력이 생산양식이 됩니다. 생산양식은 각 시대의 경제시스템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봉건제라는 생산양식이 있어요. 봉건제사회의 생산관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농노가 농작물을 만들고 장인들이 물건을 생산합니다. 그러면 그 농노와 장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영주, 기사, 그리고 국왕이 앗아 갑니다. 이게 봉건제사회의 생산관계입니다. 이 생산관계가 봉건제사회의 물적토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봉건제사회의 생산력은 무엇인가요? 쟁기와 같은 농기구, 중세 발명된 각종 철제기구 등이 비약적인 생산성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농토와 같은 생산수단등이 존재합니다. 생산력은 이렇게 생산수단+생산기술+노동자를 합친 개념이 됩니다.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일하여 생산양식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물론 생산관계라는 용어 안에는 각 노동자가 생산수단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어떻게 재화를 생산하는가? 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력이 토대라는 용어를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토대(생산관계)+생산력 = 생산양식.......이 공식을 그냥 이해하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 이게 가장 교과서적인 마르크스정치경제학적 이해입니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는 이 용어를 다소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그랬죠. 토대=생산관계=사회적존재로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문맥에 따라 혼용합니다. 더구나 마르크스 후기 저작으로 넘어가면 토대 ≠ 사회적 존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상부구조의 일부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의미의 문장이 나옵니다. 톰슨은 이 부분을 확장하여 상부구조, 즉 문화결정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아무튼.... 위 코헨의 글, 생산관계의 총합이 토대라는 개념은 정통막시즘의 해석을 그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추가 : 글을 적고 위에 본문 글을 읽어보니 생산양식이 사회적 존재, 혹은 생산양식 안에 포함된 것이 사회적 존재라는 문장이 나오네요. 이 문장을 적을 당시 사회적존재가 생산관계가 아니라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어서 그렇게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회적 존재는 생산관계이고 이말이 또 그래도 토대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첫 문장의 생산양식을 생산관계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더 이해가 빠를 거 같습니다.
뭐라고 하냐면, """ We take pains to insist that production relations alone, and not productive forces, constitute the economic structure... """ 이런 말을 하면서 각주에 그 오류를 저지른 저작물들을 저자(테리 이글턴도 있음) 및 쪽수와 함께 예시로 주루룩 달아놓았는데...(저자, 쪽수는 옮김 생략)
The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1
Illusion of the Epoch
What Marx Really Said
Marx and Mill
Marxism and Literary Criticism
Karl Marx
The Marxists
Science, Class, and Society
Social Theory as Science
하여간 졸라 많은 모양임.
달아주신 설명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사 자신도 용어를 혼용하거나 다소 확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정치경제학적 용어의 엄밀성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 생긴 모양입니다.
사실 한국좌파사상은 유독 용어, 개념의 엄밀성을 따졌죠. 그게 마르크스 이론을 소련에서 직수입하여 레닌이론과 함께 받아들인 것이 한국의 PD들이라 이론적 엄밀성을 따지는 것이 정파싸움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것이 그 대부분의 이론적 권위는 레닌의 편지와 저작에서 주석을 달아서 가져오곤 했어요. 그게 뭐 그리 맞는 말이라고...ㅋ...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이론적 개념 적확성은 아마 한국의 좌파들이 무척 강할겁니다. 이진경이나.. 진중권 같은 인간들 말입니다. 아마 아직도 줄줄 외우고 있을 겁니다. 자기가 문건에 옮겨 적었던 레닌의 서신들부터... 이스크라의 기사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재밌어요. 어쩌면 그래서 스피막이 이런 논리적이고 엄밀한 문장을 비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신식국독자? 그 개념은 어디서 왔니? 그 지식의 계보학 밑에 숨겨있는 구조는 살펴 봤니????
홍세화의 칼럼을 링크해 주시면 코지토님의 사유의 맥락을 좀더 잘 이해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쨋거나 글을 읽으며 떠오른 몇가지 생각입니다^^
- 우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을 생각나게 하는데요
미디어가 메시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새로운 미디어를 탄생시키는건 그러나 메시지 이듯
존재는 의식에 큰 영향을 주지만 의식은 사실 존재를 끊임없이 배반(?)해 온것 아닌가 하는것...
- 경험에 대해...
마르크스가 경험한 간접경험의 양과 질은 현대의 그것과는 전혀 비교대상이 못된다는 것.
끝에 언급하신 바와 같이 시뮬라르크시대의 간접경험은 직접경험과의 구분이 모호 할 정도라...
따라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소리는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소리 아닌가 하는것...
- 시뮬라르크에 대해..
사실 이런 인식(혹은 깨달음 ?)은 수천년전 싯달타가 이미 설파했던것 아닌가하는 생각....
色즉空, 空즉色 ^^
문제는 쪽수로는 절대 다수인 비기득권자들이
1%의 기득권자들이 주도하는 시뮬라르크(?)의 안개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수동적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것.
코지토님 링크 감사합니다 ~
다른건 몰러도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것들에 대해
우리는 정말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의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뮬라크르의 부정적인 면과도 연결이 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시뮬라크르는 어쩌면 권위주의 타파, 자꾸만 벌어져 가는
계급/계층간의 격차를 그나마 줄일수있는 유일한 끈 같은거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시뮬라크르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이 다듬어지면 글하나 쓰볼지도 모르겠습니다 ^^
존재의 다양성의 예로드신 친구분의 얘기는 미국의 401k제도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401K 제도란 기업들이 종업원들에게 401k라는 일종의 저축구좌를 만들게하고 저축액에 일정부분 비례하는 액수만큼
자사주를 무상분배해주는 제도 입니다.
언듯보면 종업원들의 저축을 장려함과 동시에 기업이윤 또한 분배하는 매우 훌륭한 제도 같습니다만
비록 극소지분 이지만 노동자들을 주주로 만듦으로서
노동자들의 노조화, 노조 활동억제의 한 방편으로 고안된거 아닌가 싶습니다.
의도가 어디에 있던 이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한 노동자들,
특히 초기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첨단 산업의 종업원들은 이제도를 통해
상당히 큰 혜택을 보기도해서 긍정적인 면도 분명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엄청난 비용이드는 전통적인 연금제도를 없애버리고 401k를
연금제도화 하는게 대세인데요...아마 노조는 더욱 위축될수밖에 없을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덧붙이자면....
세상에는 누군가를 탓하고 증오하지 않으면 존재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 누군가가 아크로에서는 흔히 노빠로 지칭되는 것일뿐...
그들이 원하거나 필요로하는 건 논리적 담론 같은게 아니라
'배설'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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