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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50 페이지 가량 읽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예전에 서너 편 읽었었는데, 이것도 몇 해 전에 한번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스틴의 소설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환경에서 비슷비슷한 생활을 영위하는 비슷비슷한 인물들이 줄곧 등장하는 것이다. 워낙 서양사에 대해 무식한 사람이라(뭐, 내가 무식하지 않은 분야는 또 뭐가 있겠냐마는) 오스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영국이 한창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그 시대의 지방 하급귀족 가문의, 사려 깊은 성격에 교양을 갖추었으나 혼기를 놓쳐 버린 노처녀ㅡ 이것이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이다. 오스틴의 소설들에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매번 등장하는 이 여인들은 소설 속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하녀들을 감독하며 집안을 관리하고, 연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이웃들과 교제하고, 친척들을 방문하는 등등.... 그녀들이 서 있는 자리에 부여되는 역할을 수행할 뿐,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면모를 보여 주는 일은 일체 없이 무기력하게 상황에 끌려다닌다. 그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신분의 남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두루 구비하였음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아마 이것이 실제로 그 당시의 여인들에게 주어진 길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선택을 받으면 다행이고, 선택받지 못하면 조카들의 만만한 고모 노릇이나 하면서 집안의 실권을 쥔 여주인의 눈치를 보는 식객으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오스틴의 소설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까지 꽤 넓은 지역을 무대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폐소공포증에 가까운 갑갑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작품의 주요인물들인 그녀들이 처한 이런 출구 없는 상황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그녀들의 삶을 짓누르는 신분적 제약은 반대로 그녀들에게 일종의 위엄을 부여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 하여금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든, 소설 속에서는 다른 맥락의 의미를 가리키던 바로 이 구절이 제인 오스틴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ㅡ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결정된다. 그의 사고방식, 가치체계, 자극에 대한 반응양식 모두 그가 소속된 집단에서 요구하는 데 맞추어진다. 제인 오스틴은 철저하게 자신의 계급에 속해 있는 여인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설득>에도 아마도 오스틴 자신을 옮겨 놓았을 듯한 여주인공이, 자신들보다 어느 정도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인이 홀아비인 자기 아버지를 유혹하여 신분상승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젊은 여인은 자기 분수를 넘는 일을 원하는 것이다. 그토록 사려 깊고 교양이 있으면서도 그녀는 신분제도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그런 차별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자기보다 높은 계층의 여인들에게 별로 반감을 느끼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분제도가 오스틴에게는 당연한 세계 질서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정착하여 그녀는 자신이 누리도록 허용된 관심사들에 집중한다. 드레스. 마차. 하인. 교회. 정원 가꾸기. 이웃들과의 사교. 티파티. 만찬.... 아마 소설을 쓰는 것은 그녀의 삶의 다시 없는 커다란 탈선이었으리라. 그런데, 자신이 있어야 할 거실 창가의 안락의자에 차분히 자리잡고 앉아 커튼 사이로 내다보이는 이웃집들을 참을성 있게 관찰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힘이 있다. 정확하게, 과장하지 않고, 거창한 이념으로 윤색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해 내는 것이다. 아마도 리얼리즘의 힘일 것이다. 만약 오스틴이 당시의 여인네들에게 허용되는 것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면, 세계를 보는 보다 폭넓은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의 글은 어떤 것이 되었을까? 슬며시 궁금해진다. |
2018.05.26 02:27:09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유럽에선 프랑스 혁명이 휩쓸고 지나가던 시절입니다. Austen 이 죽을 무렵 Charles Dickens 가 태어나죠.
영국에서 여자들이 참정권을 갖게된지 올해가 100년 되는 해입니다.
Austen 은 그 당시 몇 안되던 여학교를 나왔는데요. 여자아이들에게도 교육받을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던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이 너무 열악해 지금의 여자들이 생각할 수있는 평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있지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거죠.
2018.05.27 17:31:04
역사적 배경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이란게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
영국은 이미 17세기말 Bill of Rights (권리장전?) 이란게 확립되어 군주와 백성간의 타협이 있었고 법치의 근간이 이뤄집니다. 의정활동에 관한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의회의 허락없이는 세금징수도 할 수없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은 이보다 백년 후에 일어난 일이죠. 더군다나 그당시 인구 구성비를 볼때 농업국이던 프랑스의 경우 소작농이 압도적인 반면 영국은 지주들의 상대적으로 많았고 농업이외의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들이 많았죠. 영국은 번영과 팽창으로 벌써 산업혁명을 꿈꾸던 시절입니다. Textile Industry 가 생겨나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이 많은 노동량을 제공했는데요. 나름대로 격동의 시기였죠.
Jane Austen 은 이런 시절에 살면서 여자들이 단순 노동으로 인생을 보낼게 아니라 교육을 받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Austen 의 많은 작품들은 그 당시 여자들 쉽게 접근할수있는 소재들입니다. 마치 문맹국의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듯 Austen 의 소설들로 많은 여자들이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향은 대단한거죠. Austen 이 죽을 무렵 태어난 Emily Bronte. Wuthering Heights 를 쓴 작가죠. Bronte 는 Whatever our souls are made of, his and mine are the same 이란 말로 파란을 일으키죠.
Jane Austen 은 영국 여권신장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거론되는 분입니다.
2018.05.29 22:33:55
제가 써놓고도 참 난해하다 생각이 들어 부연 설명합니다.
Jane Austen 의 소설들을 읽으셨고 그 소설들에 나오는 여자들의 스타일도 파악하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시대 여자들은 보통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재력이 있는 미혼남이 아내가 필요하단것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란 뜻이고 Jane Austen 의 대표작인 Pride and Prejudice 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여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사회가 아니라 남자의 필요로 누구의 아내가 된다는 전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입니다.
반면 Emily Bronte 의 Wuthering Heights 에서 주인공 Catherine 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데요
... Whatever our souls are made of, his and mine are the same.
영국 문학에서 가장 로맨틱한 표현으로 인용되는 유명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의 사고 방식이 Jane Austen 시절과는 많이 다르다는 역사적 가치가 있어서 학교에서도 배운답니다. 30여년의 세월 차이죠. 여자들이 사랑에 대해 직선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란걸 보여줍니다. 물론 Emily Bronte 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고 1847년에는 이런 표현을 했다는게 넘 멋있어요. 이보다 100년 후의 한국과 비교를 해도 훨씬 진보적이죠.
2018.05.31 23:09:49
사실 Jane Austen 은 여권신장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이고 그에 비해 Bronte 자매들은 사회활동 보다는 글을 통해 불평등을 호소한 경운데요 ... 오히려 Austen 의 소설들에서 설정된 여자들의 사고방식이 더 소극적인건 Austen 이 살았던 세상과 Bronte 자매들이 살았던 세상에 엄청나게 큰 변화가 있었다는 걸 역설한다는 거죠. 불과 30년 차이지만요. 그 변화란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이구요.
그 당시 여자들의 수 많은 제약들 중 하나가 재산권인데요. 여자가 결혼을 하면 가진 모든게 남편의 재산이 되버립니다. 때문에 경제적 자립이란게 불가능해지죠. 당연히 남편에게 복종할 수 밖에요. 영국에서 여자들이 재산권을 갖게 된건 1870년 Married Women’s Property Act 란게 생기긴 이후입니다. Jane Austen 은 물론 Bronte 자매들 모두 이보다 훨씬 전에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인데요.
Austen 의 소설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죠. 사실 Austen 은 이 부당함을 완곡하게 비판합니다. Sense and Sensibility 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던 자매들, Mansfield Park 에서 나오는 성차별, Pride and Prejudice 에서 상속을 받을 수 없었던 여자들, 등등 찾아보시면 거의 모든 Austen 의 소설에서 불행의 시작이 재산권과 연결됩니다. Jane Ayer 를 쓴 Emily Bronte 의 언니 Charlotte 의 소설들에서도 재산권은 항상 큰 문제였답니다.
정리하자면, Austen 은 그 당시 상당히 깬 여자로 영국 여성인권운동의 창시자 수준. 여자들에게 워낙 어려운 사회 였기에 Austen 이 주장한건 결국 교육평등. 하지만 여자들에게 주어진 부당함을 소재로 쉽고 감성적인 소설들을 써서 여자들로 하여금 이런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함. 이후 세대인 Bronte 자매들에게 큰 영향. Austen 사후 50년 여성의 재산권, 사후 100년 여성의 참정권, 사후 200년 미투!
2018.05.26 22:31:08
저는 이 소설가의 작품을 한 편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만, 제목은 몇 번 보았습니다. 특히 영화로 된 작품들이 있지요.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9000032
자신이 속한 세계를 뛰어 넘는 상상을 하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고, 돈이 좀 있는 사람들도 현실에 안주하기가 쉽지요. 제 짐작으로는, 제인 오스틴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걸 작품에 반영하지는 않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대가 그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요.... 일반 사람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뛰어넘는 상상을 상상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작가들은 작품으로 남에게 널리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니.... 라면서 우리가 탄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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