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난 음료수 한둘씩은 꼭꼭 챙긴다.
대개는 캔사이다를 팩째로 사지만 패트병에 든 과일 음료를 고를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는 전에 마셔 보지 않은 새로운 음료를 고르기도 한다.
저번에 마트에 갔다가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볼록한 유리병에 든 일본 음료를 보았다.
사과, 복숭아, 키위, 수박, 청포도들이 하나씩 그려져 있는 것이 아마 과일향을 첨가한 탄산음료인 듯하였다.
  '지금 내가 이런 데 돈쓸 처지가 아닌데.... '
가책을 느끼면서도 수박이 그려진 놈을 하나 바구니 속에 넣었다.


며칠 뒤에 그놈을 마셔 보았다.
수박 사이다가 맞았다.
오, 괜찮다!
상쾌하고 시원한 맛이었다.
그야 방금 냉장고에서 꺼냈으니 시원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 얘기가 아니라 맛 자체가 시원하였다.
  '조금만 덜 달면 딱 내 취향일 텐데.... '
다음에 마트에 가면 또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박을 둘, 그리고 복숭아도 하나.
사과 맛이나 포도 맛이 나는 탄산음료는 더러 마셔 보았지만 복숭아 사이다는 어떤 맛일지 상상이 안 되니까.


난 이런 게 좋다.
조그마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 말이다.
내가 쾌락주의자 아닌가.
심오한 예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품격 높은 쾌락도 좋고,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딱딱한 책들을 이해하는 데 성공하였을 때 느끼는 지적 쾌락도 좋고, 세계가 내 앞에 펼치는 다채로운 감각의 향연을 한껏 즐기는 감각적 쾌락도 좋다.
아, 남들한테 밝히기 힘든 음란한 쾌락은 말할 것도 없고....


강신재의 중편 '파도' 중에서 사춘기를 앞둔 어린 소녀 영실이 난생 처음 카라멜을 먹던 대목이 생각난다.
아이들의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던 왜정 시절, 처음 먹어 보는 카라멜 맛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신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 강렬한 맛에 흠뻑 빠진 영실은 생각한다. 이렇듯 황홀한 물건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자기는 절대 싫어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이 소녀 영실은 동서고금을 통털어 내가 읽은 문학 작품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분노건 매 순간 순간의 감정에 흠뻑 젖어들고, 늘상 감각의 촉수를 빳빳하게 세우고 살고, 작은 쾌락이라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세상의 규율 따위는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욕망에 정직하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려 들지 않고....
정당화할 필요가 왜 있겠는가. 그녀의 내부에서 욕망은 이미 정당한데 말이다.
그렇듯 철저히 자기 본위로 살아가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주위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잃고 살지는 않는다.
처음 보는 아낙네가 크나큰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영문도 모르면서 덩달아 함께 울 정도다.
그렇게 타인에게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하게, 정확하게 그들을 통찰한다.
모르긴 해도 영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아닐지....


아무튼, 수박 사이다 덕분에 사는 일이 조금더 즐거워졌다.
영실처럼 그놈 때문에 세상을 싫어하지 않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음료수 하나 때문에 삶이 즐거워진다는 건 우스꽝스럽지 않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남들 눈에 더러 유치해 보이건 말건 상관할 필요 없다.
가뜩이나 힘겹고 피곤한 삶, 잠깐 잠깐씩이라도 즐거운 기분이 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