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2년 전 일이었다.
당시 내가 경비원으로 일하던 관공서 로비에 비치된 서가에 그의 소설 몇 권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더 잡'을 읽었다.
잡지사에 다니며 잡지에 실을 광고를 따내는 업무를 맡은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것 말고는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은 소설이었다.
가치 있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오락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2백 권 남짓한 장서 중에 더글라스 케네디 책이 대여섯 권이나 있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 봤는데 모두 첫 작품과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오락거리로서는 괜찮다, 하지만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책 겉표지에 적힌 소개말을 보니 이 작가가 프랑스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였다.
프랑스 사람들 수준이 생각보다 낮구나 싶었다.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좀더 품격 있는 소설을 선호할 줄 알았는데....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들에는 모두 비슷비슷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비교적 교양 있는 중산층 남자들 말이다.
그들은 대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아내와는 사이가 나쁘지만 자식에게는 티없는 애정을 품고 있다.
간혹 아내 아닌 여자와 바람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선량한 인물로 남는다.
요컨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이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바로 이 점ㅡ독자들이 그 앞에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그의 인기 비결이 아닐까 싶다.




케네디의 주인공들이 교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교양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못 된다.
고작해야 가끔씩 클래식 음악을 듣고 조금 딱딱한 잡지를 읽는 정도다.
그 클래식 음악도 무슨 난해한 현대 음악이 아니라 차이코프스키나 드보르작같이 '스탠다드'한 작곡가의 곡들이고, 딱딱한 잡지들은 직업적 필요 때문에 읽을 뿐이다.
그들이 평균치 이상으로 지성적인 인물이라고 설정돼 있기는 하지만 그 지성이 작품 속에서 대화나 사유를 통해 직접 드러남으로써 읽는 이를 위축케 하는 일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처럼 극단적인 사상을 추구하여 우리를 압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패티쉬나 스와핑같이 조금은 위험한 취미를 탐닉하지도 않고 마약을 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알콜에 과잉 의존할 뿐이다.
지성적인 면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고 도덕적인 면에서는 그보다도 더 만만한 인물들, 요컨대 교양 있는 속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케네디 자신이 딱 그 수준일 듯싶다.




책 겉표지에 적힌 작가 소개를 보면 더글라스 케네디가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내가 본 더글라스 케네디는 미국 사회의 가치관에 전혀 이의가 없는 인물이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 모두가 갈등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갈등은 도덕적 원칙에서 비롯된 갈등이 아니라 상황에서 오는 갈등에 지나지 않는다.
기성 사회에 철저히 순응하는 사람들, 미국적 가치관의 대표 같은 사람들이 케네디의 주인공들이다.
물론 작중 인물이 곧 작가 자신은 아니지만 케네디의 경우에는 인물들은 그 자신의 분신들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케네디의 소설들에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돼 있다.
무엇이 인간을 비루한 존재로 만드는가, 인간이 위엄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그의 소설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작가가 진지할 필요는 없다.
진지한 작가도 있고 오락성에 충실한 작가도 있는 것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후자에 속한다.
자신이 그 속에서 잘 헤엄칠 수만 있다면 미국 사회에 전혀 불만이 없을 인간이다....라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얼마 전부터 그의 책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더랬다.
술술 읽히고,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데도 흥미를 유지시키는 그의 테크닉을 배워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글라스 케네디란 이름이 영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꽤나 전형적인, 그러니까 독일계도 프랑스계도 아닌 정통 영국계 이름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얼핏 잭 스펙터란 이름이 떠오르기에 도서관 컴퓨터로 소장 도서를 검색해 보았지만 그 이름의 작가가 낸 책은 도서관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빅 픽처'란 책 제목 하나가 생각나 더글라스 케네디란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잭 스펙터는 누군데 그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거지?
다음에서 검색해 봤더니 '프로이트 예술미학'이란 책의 저자였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이었다.
그 책도 제본이 느슨해져 새로 구입하기는 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