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zzling님의 글
인간이 이미 개라는 종을 인간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로 진화시켜버렸어요. 개는 어려움에 처하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해요. 개는 인간이 책임져야 해요. 친구로 만들어 버렸으면 먹지 말아야 해요. 평생을 콩나물 시루같은 우리 안에 갇혀서 인간의 따뜻함이 뭔지 모르던 천덕꾸러기 개들도 미국, 캐나다가 구원해서 데려가면 가족 못지 않은 친구가 돼요. 그냥 안 먹고 너도 나도 개의 고통을 덜 목격하며 살면 되지 어떤 개는 지옥같은 환경에서 평생을 살다 두드려 패대기 쳐서 탕국에나 등장하고 어떤 개는 온갖 관심 다 받다가 늙어 병들자 인간에게 버려져서는 어느날 두드려 쳐 맞고 탕국에 등장하고 어떤 개는 농장에서 짐승처럼 갇혀 지내다 운 좋게 구조돼 인간의 평생반려자가 되고 어떤 개는 부자인간집에서 태어나 버르장머리없이 굴어도 인간들이 줄줄 빠는 이 모든 풍경을 왜 굳이 감당하고 사냐 이거죠.     

자기는 개 키우지만 개고기 반대 안 한다는 사람들, 내 개만 안전하면 됐지 다른 개들은 날 때부터 고통받고 살다가 먹거리로 전락하는 게 운명인데 어쩔 거냐 할 건가 싶네요. 



답 : 그건 인간이 먹이사슬 최상위 점에 있으면서 '편의성에 의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개는 그냥 인간이 섭취할 육식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편의성에 의하여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이고요.


그냥 선택입니다.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인간의 선택 말입니다.

어떤 개는 팔자가 말 그대로 개팔자이고 어떤 개는 정말 박복하죠. 인간의 선택일 뿐이고 그렇게 개팔자가 정해진겁니다.


그럼 인간은요?

아래는 아프리카 기아선상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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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사진 속의 저 비극적인 아이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단지, 선택의 결과입니다. 카오스 이론에 의하면 님과 저 아이의 처지가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예를 들어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한게 아니라 호박벌이 날개짓을 했더라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닌가요?


솔직히 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감정의 낭비이자 문명의 과잉입니다. 모든 인간, 저는 물론 님 역시도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중성에 일일히 분노하여야 한다면 해골 아파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분노의 지점이 다르고 감정이 동요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하여는 저는 분노하는 대신에 님은 분노하지 않을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분노하는 지점에 분노하지 않는 님을 비난할 수 있나요? 그건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단지 상대방이 분노하지 않는다고 분노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님의 담벼락에서의 사건 때 언급했지 않습니까? 즉, 부적절한 반응을 보일 때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분노하는데 왜 너는 분노하지 않느냐?'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고기 습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습관입니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개고기에 미쳐서 개고기 습식을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성하는 사람들 중 70%가 일년에 한번 정도 (주로 복날이겠죠) 먹고 두번 이상 먹는 사람은 10%가 채 안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타파해야할 지점은 전혀 보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고기를 먹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버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뭐, 개팔자가 사나와서 탕으로 만들어지는 개들에 대하여 동정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탕을 먹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하는 것은 감정 과잉입니다. 그냥, 습관입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