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와 참나에 대해서

무아를 실체로서 인식하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이해는 수학의 제로(0)와 무한대(∞)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무아의 무(無)자를 있고 없음의 이분법에서 '없음'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오류가 된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있음을 기반으로해서 주관과 객관이 분화되어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없음은 그냥 없음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상상도 인식이기 때문에, 없음은 상상의 세계에서도 없다.

따라서 있음(有)은 대전제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이 참나인가?' 하는 물음은 있냐 없냐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나와 세계가 실상 어떻게 존재하는를 올바로 인식하고 있느냐를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0은 셀 수 없는 상태이고, 기준점이다. 없음(0)은 있음의 반대 상태가 아니고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 즉 통합(unity)이다.

무한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상태이고,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는 상태, 즉 무상(無常, changing)이다. 제행무상(諸行無相)이다.

부처는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가르치셨다.

무아(無我)에 나(me)라는 언급이 있다고 해서, 무아라는 단어에서만 참나를 찾으면 '내가 없는데, 진짜 나는 따로 어딨는가?'하는 순환논리 오류에 빠지고 만다.

참나는 무아(無我)와 무상(無常), 즉 0과 무한대를 동시에 인식함으로서, 나와 세상의 관계, 나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 주관과 객관의 통합과 분화, 생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노력들의 지향점이다.

이것은 선사들이 세워 둔 이정표다. 무아, anatman, 불성, 참나, 한마음, 주인공, 하나님, 알라... 등등 많은 이정표가 있는데, 나는 그 이름들이 사과를 애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사들이 베어 물어야지 맛을 알지 백날 이름과 모양만 들여다봐서는 뭔 맛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깨달음은 고정된 상태 혹은 없음(空)의 체험이나 머무름이 아니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듯이, 둘 아닌 도리로서 세상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또, 고정됨 없이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