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대여섯 권의 프로이트의 저술들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이 '토템과 터부'다.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음, 실은 십 년쯤 전에 이미 착상이 떠올랐던 이 글을 지금껏 미뤄 왔던 것은 내 능력으로는 '토템과 터부'를 조리 있게 요약하여 소개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뭐, 지금도 그 책을 요약하는 일이 내 능력에 벅차다는 점은 여전하지만 더 미루다가는 이 글을 쓰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성싶으므로 필경 엉성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시도부터 해 보고자 한다.
가능한 한 간략하게. 정제된 학술적 언어 대신에 내 특유의 즉물적 언어로.



한 마디로, '토템과 터부'는 토템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트 식의 설명이다.
토테미즘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설명할 필요 있나?
토테미즘이란, 요컨대 한 부족 집단이 특정한 동식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해당 토템에 대한 터부는 그 사회의 결속의 토대를 이룬다.
자, 터부란 개념이 등장하였다.
함부로 접촉하지 않음으로써 보호한다, 회피하지만 그 아래로는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이거, 상당히 낯익은 모습 아닌가.
그렇다. 바로 존경과 혐오가 공존하는 양가감정, 프로이트를 열 페이지만 읽으면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프로이트 정신의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적 도구다.



'토템과 터부' 첫머리에서 프로이트는 우선 강력하고 무자비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는 원시 사회를 스케치한다.
그 사회에서는 지배자ㅡ'아버지'가 여자들을 모두 독점하고 나머지 남자들ㅡ아들들은 여자를 건드리지 못한다.
단 한 명의 남자만이 번식을 할 수 있는 집단의 종족 유지가 과연 가능한지 어떤지 하는 문제를 프로이트가 어떻게 처리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프로이트의 숨가쁜 논지 전개를 따라잡기에 급급하여 미처 그런 문제점을 파악할 여유가 없었던 듯싶다.




아무튼, 일어나야 할 일이 결국 일어난다.
'아버지'의 폭압을 견디다 못한 아들들이 마침내 반기를 들게 되는 것이다.
아들들은 단결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ㅡ 여기서부터 사태는 반전된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목적이 달성되자마자 아들들의 결속은 깨지고 '아버지'의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가혹하면 가혹한 대로 잘 유지되었던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 결과가 하도 참혹하여 아들들은 '아버지'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절을 차라리 그리워하게 된다.
이 모든 혼돈과 불행이 자신들의 부친 살해에 대한 처벌로 여겨지게 되고 아들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디프스 콤플렉스의 시작이다.



살아 남은 아들들은 결국 다시 협정을 맺는다.
'아버지'에 대한 투쟁의 성과를 반납하고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처벌하게 된다.
아들들은 주기적으로 부친 살해 행위를 재연하며 살해 당한 '아버지'를 애도한다.
이것이 토템이다.
토템에서 숭배되는 동물은 죽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토테미즘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런 해석을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법칙으로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위에서 말하는 '원부(原父) 살해'를 과연 세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원부 살해'를 프로이트가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았는가, 아니면 여러 차례 반복된 일로 보았는가 하는 점 역시 지금은 아리송하다.
아, 이건 프로이트 탓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분명 그 점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했을 텐데 내 시원찮은 지력이 이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 것이다.
한 번 더 '토템과 터부'를 읽으면 그땐 확인할 수 있겠지....




요즘 들어 박정희를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듯하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문득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책 '토템과 터부'였다.
박정희야말로 우리 한국인에게는 강력한 부상(父像)을 의미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포악한 압제자인 아버지, 아들들의 반항, 그 중 한 아들에 의한 부친살해, 그리고 그 사후에 벌어진 아들들의 분열....
박정희가 이 나라 정치판에 던진 파장을 프로이트가 얘기한 토템의 발생 시나리오에 대입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심지어는 박정희 생전에는 그를 미워하던 이들마저도 그의 사후에 벌어진 극심한 혼란상에 넌더리를 내며 그래도 박정희 때가 좋았다고 생각이 바뀐 현상까지도 일치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박정희는 엄연한 독재자였다.
박정희의 뒤를 이은 통치자들이 하나같이 예외 없이 추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을 바꾸어 주지는 못한다.
다른 놈들의 통치가 엉망이었다고 해서 박정희의 독재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좋은 독재는 없다.
죽은 독재자가 좋은 독재자가 될 수도 없다.



....여기까지가 10년 전 내가 처음 이 글을 쓰려고 생각했을 때의 원래 구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하다 싶어 포기하고 난 몇 년 뒤에 박정희의 뒤를 이어 또 한 명의 원부상(原父像)을 환기시키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의 죽음이 '아들들'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박정희보다 더한층 원부에 가까운 인물, 바로 노무현이다.
박정희의 죽음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던 아들들이 이번에는 맹목적인 파토스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들 있다.
노무현 생전에 냉철하게 그를 비판하던, 그리고 사후에도 얼마 동안은 꽤 차분한 이성을 견지하던 이들마저도 차례차례 그 죄의식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는 듯하다.
프로이트의 '아들들'이 살해 당한 '아버지'를 이상화하듯, 한국인들은 노무현을 이상화하고 있다.
그의 자살을 불러들인 원인이 비리 문제에 있지 않기라도 한 양.
엄연한 자살을 타살로 규정하기까지 하면서.
이 땅의 아들들의 죄의식은 언제나 가라앉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