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산업혁명 때 프랑켄슈타인(괴물) 원천(原泉)은 소일거리로 지어낸 이야기인데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것인지 몰라도 프랑코 모레티는 사회적 분석을 가하여 사회전체가 소유주와 무소유자 두 계급으로 나누어지는 시대로 본다. 즉 프랑켄슈타인(괴물)과 드랴큐라(흡혈귀)는 두 계급을 투영한 두 얼굴로 본다. 잔혹한 소유자. 흉측하게 생긴 비참한 사람-무소유자,노동자 라고 하며 드라큐라는 지배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즉 런던을 정복하기 위해 금을 투자하는 합리적인 기업가. 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괴물에게도 이름과 개인적 정체성은 거부된다. 피셔의 영화에서 괴물과 흡혈귀의 활력은 완전히 사라진다.

 

공포는 괴물의 공격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 때문에 시작된다.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공포가 발생한다. 이것은 복지 국가적 공포이다. 평화 공존시대의 고유한 형태이다. 프랑켄슈타인 본인이 이 괴물을 다른 종족의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한다. 프랑켄슈타인(본인 말과 달리)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 종족을 창조하길 원한다. 흉측한 괴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프랑켄슈타인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산업 혁명 초기의 몇 십년 동안의 현실이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를 보면 시민 사회 비판자들의 메타포(은유)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 괴물은 퍼커슨의 노예, 청년 마르크스가 묘사한 소외된 노동의 변증법을 채현하고 있다.


다 많은 가치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무가치해지고 더욱더 값어치 없게 된다는 것, 그의 생산물이 정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더욱 더 기형화된다는 것,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의 발명품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 즉 왜곡하면서 형태를 만들고 야만화시킴으로써 문명화시키고 빈곤화시킴으로써 부유하게 만드는 등 정과 반이 동시에 나타나는 양면적 과정의 유력한 메타포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 괴물-프랑켄슈타인은 이를 이용해 대사업을 일으킨다. -은 항상 부정에 의해 묘사된다.

 

프랑켄슈타인의 두 극단은 과학자와 괴물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두 극단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메리 셜리의 소설은 실제로는 기본적 도식 즉 단순화와 분열이라는 도식 (사회전체가 두 계급으로 나누어 졌다)에 기반한다. 이 과정은 희생자를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 최후의 말은 가정의 애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월튼이 고향과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메시지 전달의 핵심이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헤겔과 마르크스의 전철을 밟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친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정--합의 끊임없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헤겔도 마르크스도 변증법적 과정의 소멸을 그 결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구현된 입헌군주제 국가를, 그리고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변증법적 과정의 종착역으로 보았고, 그것도 도달 못할 아득히 먼 미래의 이상향이 아니라, 당대의 모순이 해결되면 곧 바로 실현될 수 있는 눈앞의 미래로 설정했다. 말하자면 변증법론자이면서 실제로는 변증법의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한편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의 지위로 밀려난다. 사회가 적대적 양극으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월튼의 가족에서 상징적으로 재통합되는데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드라큐라 백작은 말하는 방식에서만 귀족이다.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를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탈인간화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로서 소외된 노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실제로 몸이 없는 즉 교환가치는 있어도 사용가치는 없는 사회적 생산물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 생산물은 돈이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돈이 다시 생명을 얻어 자본이 되어 세계 정복에 나선다. 바로 이것이 흡혈귀 드라큐라 이야기이다.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 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 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비유는 흡혈귀라는 메타포의 본질을 드러낸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듯이 흡혈귀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죽었지만 산 사람에게서 빨아먹는 피 덕분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흡혈귀가 강해질수록 살아 있는 사람은 약해진다.

사회 전체가 소유자들과 무소유의 노동자들이라는 두 계급으로 나뉘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견인 동시에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종언에 대한 사전경고였다. 공포 문학은 바로 분열된 사회의 공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욕망에서 태어났다.

   

드라큐라는 권력욕이 아니라 권력의 저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의무에 의해 행동으로 내몰린다. 만약 흡혈귀가 자본의 메타포라면 1897년에 등장한 스토커의 흡혈귀는 1897년의 자본일 수 밖에없다. 이 자본은 20년 불황 동안 묻혀있다가다시 나타나 이제는 되돌길 없는 축적과 독점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드라큐라는 진짜 독점 자본가이다. 독점 자본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주의 시대의 최후의 잔재마저 복속시키고 모든 형태의 경제적 독립을 파괴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드라큐라 부르주아적 세기의 최종 산물인 동시에 그에 대한 강한 부정이기도하다. 개인주의는 드라큐라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돈과 종교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귀족주의적 삶의 모델을 연장하고 찬양했다. 드라큐라의 적들은 자본주의의 변호인들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영국 자본주의의 결론이다. 따라서 모리스를 흡혈귀로 만드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직접 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개인주의 대 흡혈귀의 총체화 간에 진행되는 한 인간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드라큐라는 성적 욕망을 해방시키고 찬미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동시에 놀래킨다. 공포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검토해 온 이데올로기적 가치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이 문학이 축출하려는 진짜 위험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자본과 임금 노동 관계가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서는 초자아와 무의식 관계가 그렇다. 결론적으로 공포문학은 늦은 속도로 정반합의 끊임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생과 공생을 추구해가고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By:전투와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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