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제 옆에 쪼금 더 젊고 키 큰 아베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어요. 
제 자리가 복도쪽이었고 그 아저씨가 저보다 안쪽으로 앉아 있었거든요. 
자리에서 자주 이탈을 하셔서 제게 좀 미안해 하시더라고요. 

영어로 쏘리하는 걸 들어보니 한국사람인 것 같았어요. 그치만 외국에선 서로의 국적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예의상 영어로만 얘기하지요. 아저씨가 부탁해서 자리를 또 비켜주려던 참에 지나가던 스튜어디스가 한국말로 (비행기가 흔들리니) 제게 앉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자리에 앉았더니 그 아저씨가 제게 한국 사람이녜요. 그래서 '네' 한 순간 그 시점으로부터 엄청난 수다의 향연이 펼져친 거예요. 

제가 외국사람인 줄 알고 말을 안 걸다가 스튜어디스가 한국말로 '앉아주세요'라고 한 말에 제가 앉는 걸 보고 '아 한국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대요. (외국사람이라면 중국사람, 일본사람 외에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데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을까.. 궁금했지만 안 물어 봄). 

무지하게 많은 얘기를 해서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여튼. 
제가 먼저 꺼낸 한 두마디를 제외하고는 그 아저씨가 제게 많은 말을 걸어오셨는데 참 희한한 분이셨어요. 

제가 질문을 잘 않는데 혼자서 화수분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쏟아내셨죠. 자기는 이런 이런 사업을 하고 결혼을 일찍 해서 벌써 손주가 있다고 했어요. 한국에는 여행 삼아 꽤 오랫동안 머물 생각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어요. 아들이 둘 있는데 아들이 결혼한 과정, 손주가 인생에서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가란 가없는 감동, 독실한 크리스찬이며 가끔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고 하셨죠. 일찍 결혼 해 아이를 낳자 돈 버는 일에만 심신을 다 바쳐서 아.. 내가 너무 돈만 바라보고 살았구나란 자각이 들었고 여유있게 살아야겠다 생각하셨대요. 전에는 늙어서 한국에 가서 살 생각이었지만 미국에서 수 십년 동안 살다보니 이제는 미국이 좋고 한국은 싫다고 하세요. 한국사람들은 너무너무 바쁘고 사고가 영리하고 삶이 강퍅해서 자기랑 맞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사업체가 미국 여기 저기에 있다고 하시니 아마 경제적으로 굉장히 여유있는 분일 거예요. 그치만 자신의 얘기가 자칫 거만하게 들릴까봐 신경을 꽤 쓰시는 편이었어요. 제가 아이없이 남편이랑 둘이 지낸다고 하니까 놀라시면서 아 그런 라이프도 있구나 굉장히 특이하시다 normal life가 아니니 흥미롭다면서 많은 호기심을 보이셨죠. 그리곤 금방 normal life가 아니라는 자신의 말에 급후회를 하시면서 제게 큰 결례를 저질렀다 자책하셨어요. 전 아무렇지도 않았던 바.. 저는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는데 기내가 시끄러우니까 아저씨 쪽으로 귀를 바짝 대고 있다가도 아저씨의 이야기가 끝나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티비화면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면 곧바로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제 팔을 조심스럽게 톡톡 치면서 또 수다를 이어가셨어요.   

제가 한 번 눈을 반짝거리면서 대화에 적극적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일본얘기를 할 때였어요. 일본에 가 본 사람들마다 일본사람들이 그렇게나 예의가 바르고 나이스하다는데 얼마나 나이스하면 그러나 나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여튼.. 아저씨는 그렇게나 말씀을 많이 하시면서도 실제 자신은 굉장히 과묵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사업체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저씨에게 한 말이 있는데 아마 오 년 동안 아저씨가 말 한 걸 전부 녹음해도 오분 밖에 안 될 거라고요.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수다가 터진 상대를 만난 건 제가 첨이래요(이 기억이 맞나? 가물가물. 여튼 흔치 않은 일이라는 말씀이었음). 

여기까지는 대수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겠으나.. 

신기했던건 그 아저씨의 수많은 수다 중에 튀어나온 몇몇 발언들이에요. 매우 신실한 크리스찬이면서 현재 기독교의 타락에는 한탄을 금치 못하셨죠. 귀하게 자란데다 하고 싶은 일도 맘껏 하고 살아서 집안에서는 손끝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자신이 아내와 며느리 등 가족을 위해 손수 요리를 만들어 주며 큰 기쁨을 느낀다던 그 아저씨는 대화 중간 이상한 발언을 천진난만하게 하곤 했어요. 일본얘기가 한창일 때 저더러 같이 2박 3일로 일본에 여행가면 얼마나 좋을까란 얘길 하셨어요. 아저씨의 말에 제가 고개를 살짝 돌려 다시 티비화면을 보니 분위기가 쎄..했죠. 아저씨는 이내 자신은 순수하게 꺼낸 말인데 마치 작업하는 것으로 들렸을 수도 있었겠다며 겸연쩍어 하셨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전 또 속으로 '아 그냥 많이 순수하신 분인가부다' 잠깐 이랬다가...

아저씨가 이번에는 티비프로 1박 2일 얘기를 꺼내시더니 끄트머리에 같이 1박 2일로 여행을 가면 참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전 마음이 복잡해졌는데 아저씨는 이럴 때면 곧잘 아내분이 얼마나 쿨하신지 자랑을 늘어놓으셨어요. 시골 친정에 간다 하니 제가 사는 곳에 들를 수 있다 하세요. 자신은 휴대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관계로 굳이 제게 친구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면서 혹시나 시간이 나거들랑 연락을 하라고 하셨어요. 상냥한 아저씨 면전에다 대고 거절을 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메모지에 적어 놨죠.  

이러다가 또 정치이야기로 넘어갔어요. 이런 공론장이 아니면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이 아저씨는 정치, 시사에 무지하게 열광하는 분이었어요. 아 저기, 이 분은 신앙심이 큰 만큼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어요. 뭐라고 하셨더라.. 운명을 믿느냐고 하셨던가. 여튼 그런 비슷한 질문을 하시길래 저는 무신론자에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하니 저의 대답에 김어준이 생각났다고 하셨어요. 이 분은 김어준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분이었어요. 저는 속으로.. (김어준 이 새끼가 무신론자였구나)...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아무리 정치성향이 달라도 전 다 이해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아저씨가 아주 큰 맘 먹고 제게 들려주신 김정은에 대한 생각과 911테러가 터졌을 당시의 심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 드렸더니 너무 감동하시는 거예요. 자신은 가족에게조차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여자에게는 절대 이런 얘기를 안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또 제가 부산에 갈 일이 있을까 타진해 보는 듯했고 생선을 좋아하냐 고기를 좋아하냐 물으셨어요. 부득부득 꼭 다시 만나 식사라도 하면 좋겠다시길래 '우리 남편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전화번호는 왜 받아적었냐고 물으셨어요. '그냥 예의상..' 아저씨는 저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신뢰에 깊이 감명 받았다고 했어요.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저씨가 제게 대학 다닐 때 인기 많았겠어요 라고도 하셨어요 ㅋㅋㅋ. 이런 얘기를 아줌마사이트에서 하면 다들 왜 한큐에 디스하지 않고 전화번호도 따라 적고 그런 추파를 다 받아주냐면서 저를 비난하며 서로 경쟁하듯 자신이 얼마나 정숙한 사람인지를 과시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 자기검열, 열녀부심 너무 유치하다는 윽...  

참 희한한 아저씨구나 했지만 제가 나긋하게 선을 그으면 거기까지인 신사이기도 했어요. 보통 비행기 타면 에너지 비축을 위해 내내 자는데 아저씨 땜에 잠을 못 자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으스러지게 피곤했어요. 아저씨는 제게 많은 호감을 보이셨어요. 특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신다는데 작업멘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분이 세상 어딘가에 갈 일이 있다면 친구들에게 저에 대해 굉장히 낭만적인 기억을 늘어놓으실 것 같았어요. 아 그래 누군가에게 나는 참 좋은 기억으로 남겠구나란 생각이 드니까 저도 나쁘지 않아요.  



"Somewhere unwritten poems wait, like lonely lakes not seen by any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