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했다. 하필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을 연상시켜주어 시작부터 끝까지 가슴이 무거웠다. 친미파(사실은 한미동맹파)와 친중파(사실은 미중 균형외교파)로 갈라져 있는 작금의 현실처럼 영화 속에서는 화친파와 척화파로 나눠 나라의 미래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그러면서 자꾸만 현실과 오버랩이 되는데, 내게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대표되는 ‘화친파’가 친중파로, 예조판서 김상헌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가 친미파로 보여 지면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쳤던 선대 임금 광해군을 퇴위시키고 명나라 일색으로 돌아가고자 인조 임금을 내세웠다가 청나라로부터 치욕적인 보복성 공격(호란)을 두 차례나 당했던 그 시절이, 마치 G2시대에 미중 균형외교를 버리고 해방 후 특히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고마운’ 역사를 들먹이며 친미 종속외교로 기울어 사드까지 배치하다 중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해 섬뜩하기조차 했다. 황동혁 감독이 영화를 언제 기획 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묘한 타이밍의 개봉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 영화가 원작소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면 소설가 김훈이 역사의 원리와 법칙을 잘 꿰뚫어 본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인가.


그건 그렇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가슴에 메아리처럼 남아 울리는 것은 최명길의 절규 “임금이 무엇입니까? 오랑캐 가랑이를 지나서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다면...”이라는 대사다. 사실 정치에 들어오고 난 뒤 갈수록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 마음을 정치지도자는 지녀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의 바탕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어미의 그 마음’이라고 요즘 늘 말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는 올바른 정치는 “병식신 무신불립(兵食信 無信不立)”이라 했다지만, 그것은 임금이 백성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느냐 곧 임금의 입장에서의 것이고, 진실로 백성을 위하는 임금이라면 설사 백성으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할지라도 백성의 양식을 챙겨주는 그 임금이 참된 임금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다. 백성을 살리는 정치, 그래서 민생정치를 나는 정치의 지고선이라고 여기고 있다. 안철수 현상, 더 나아가 그 전에 문국현 정주영 열풍이 불었던 것도 거기에 대한 바닥 민심의 갈망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최명길과 김상헌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첨예하게 맞선 격렬한 논쟁에서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제3자적 위치에서 중립을 지키자고 마음속으로는 다짐했지만, 내 자신 모르게 최명길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은 단순히 이병헌의 연기가 김윤석의 연기보다 더 출중해서만은 아닐 것이었다. ‘만고의 역적’이 되어서라도 백성의 삶만큼은 지켜내겠노라는 그 핏발 선 모성애적 리더십이 거기에서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병헌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마다 내 눈시울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영화는 참으로 ‘무엇이 백성을 위하는 길인가’에 대한 화두를 지금 이 순간에도 던지게 만든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다시 이 시대의 명나라 청나라인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열강의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촉즉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47일간 절대고립의 남한산성’ 처지인 까닭이다. 그러면서 내 눈에 끊임없이 밟히는 것은 박해일(인조 임금 분)도 이병헌(최명길 분)도 김윤석(김상헌 분)도, 심지어 송영창(영의정 김류 분)도 아니고 무능한 위정자들로 인해 남한산성 안팎에서 고통 받는 고수(서날쇠 분)와 같은 민초들의 삶이었다. 영화는 끝났지만, 한동안 엔딩스크롤 자막 위로 당시의 위정자들과 작금의 정치인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겹쳐서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임금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절규와 함께...


영화 ‘남한산성’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