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project-syndicate.org/commentary/north-korea-nuclear-program-invasion-by-christopher-r-hill-2017-06

크리스토퍼 힐의 북한에 관한 기고문에 일본인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어요. 


Japan did not kidnap Korean women for prostitution; it did not annihilate the Korean language and culture; the Korean population almost doubled in the thirty-five years' rule by Japan and its economy grew at more than 3% annually on average and education spread; Koreans were exempted from military conscription unless Koreans voluntarily applied. Japan abolished torture as a means of police investigation and criminal punishment except for flogging, but "In Yi (the last Korean) dynasty Korea, law was administered by court appointed officials. They were all corrupt (as in China), and verdicts were handed out to highest bidder. Torture was was commonly used, both on suspects and witnesses. This was to gain the desired verdict. After annexation, in general, Japanese law became the law of the land. An exception was made for the case of murder. Korean penalties were kept in this case. This was because the punishments mandated by Japanese law was considered too mild to have an effect upon Korean crime. At this time, murder was quite common in Korea. Flogging was refined so that women and chilren and the mentally disabled could not be punished by it. It was banned altogether in 1920 (Max von Shuler, An American Speaks The Japanese History That Some Want Hidden, Haat Shuppan, Tokyo, ISBN978-4-8024-0028-2 c0021, biligual in English and Japanese)


"일본은 매춘을 위해 한국인 여성을 납치한 일이 없다. 한국어와 문화를 말살하지도 않았다. 35년 일본 통치기간 동안 한국의 인구는 거의 두 배 증가했고 경제는 연평균 3%이상 성장했으며 교육이 확산되었다.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신청하지 않는한 군징집을 면제받았다. 일본은 경찰의 수사와 형벌 처벌 수단으로 고문을 폐지했다. 그러나 "이씨 왕조에서는 법원이 임명한 관리들에 의해 법이 집행되었는데, 모두 중국과 마찬가지로 부패했고 판결은 최고형으로 내려졌다. 용의자와 증인 모두에게 고문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원하는 평결을 얻고자 함이었다. 병합 후 일반적으로 일본법이 한국법이 되었다. 살인 사건은 예외였다. 이 경우 일본법은 한국 범죄예방에 효과적이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당시 살인은 한국에서 흔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태형은 수정하여 여성이나 아이들, 정신적으로 장애가있는 사람들은 태형당할 수 없었다. 결국 태형은 1920년에 모두 금지되었다." (구글번역 조금 수정) 


일본인의 시각은 극히 일본중심일 뿐이에요. 단 저 댓글에서 1910년대 조선 이씨 왕조 말기의 상황이 일본에 비해 극도로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이었음을 엿볼 수는 있어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15/2010041502420.html?rsMobile=false

신영길 근현대한일연구회 회장의 에세이예요. 1937년에 그는 초등학생이었어요. 우연히 태극기에 대해 처음 알게 되고 미술시간에 태극기를 그렸다가 일본순사에게 끌려 간 후 3일 만에 풀려났는데 그 후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이 찍혔지요. 당시 일본의 한국문화말살정책이 서슬퍼랬음을 알 수 있어요. 성인이 되어 철도국에 취직한 그에게 일본인 철도국장은 사람 좋은 보스였다고 해요. 해방이 되자마자 “이제 나는 패전국민이고, 귀하는 1등 국민이다. 새 정부에 큰 일꾼이 돼라”면서 돈을 주었죠. 


마지막 단락이 인상적이었어요. '내 나이 이제 85세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다. 내 어릴 적 태극기로 인해 겪었던 일은 그 무엇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충격으로 시작되었으나 마음이 아련해지는 추억도 없지는 않은 기억이다. 평생 근현대사(史) 연구를 많이 했지만 친일 인명사전 만드는 사람들처럼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다. 그 시대가 정말 어떠했는지를 밝히고 알리는 데 남은 날들을 쓰고 싶을 뿐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3/2017062302260.html

이 분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님이세요. 본문에 이런 단락이 나옵니다. 


―도산의 마지막 강연을 들으셨다고요?


"도산 선생이 감옥에 있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우리 시골마을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죠. 살다 보니 나를 오늘까지 키워준 분은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에요. 도산에게는 애국심을, 인촌에게선 인간관계를 배웠지요. 이승만 박사가 왜 실패했는고 하니 소인배와 아첨꾼을 썼기 때문이에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편가르기를 했어요. 내 사람, 같이 일할 사람, 영 아닌 사람으로 나눴고 아닌 사람은 당 내에서까지 내쳤죠. 그렇게 분열되면 정치 못 해요."


―인촌에 대한 친일 논란은 어떻게 보시나요.


"만약 내가 인촌 선생한테 '선생님, 친일분자라는데 속상하시죠?' 물으면 '그건 괜찮아,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면 돼' 하실 분이에요. 국민 대부분은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잖아요. 내 경우인데, 숭실학교 다닐 때 갈림길에 섰어요. 신사참배하고 학교를 다니느냐 거부하고 자퇴하느냐. 같이 공부하던 윤동주 시인은 그게 싫어 중3 때 만주로 떠났지요. 저는 자퇴하고 1년 동안 학교 안 다니다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 복학했습니다. 그때 똑똑히 봤어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신사참배를 갔는데 저는 키가 작아 맨 앞줄에서 교장 선생님을 따라 들어갔어요. 나오다 그이가 돌아서는데 얼굴 주름살 위로 눈물이 죽 흘러내렸어요. 신사참배 안 해도 되는 분이 우리 때문에 하셨구나, 학교와 학생을 지키려고 십자가를 지셨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누구는 그를 친일파라 하겠지만 저는 부정합니다. 그때는 이름 있고 한자리씩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그런 일이 아주 많았어요. 정황도 모르면서 어떤 기록이 나왔으니 친일파다 하는 건 섣부르고 얕은 생각이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6261.html

인촌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사 사장 등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김성수 친일행위 결정에 반기를 들고 소송을 걸었지만 항소심에서도 인촌의 친일행위는 인정되었다고 해요. 


군함도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수만 명의 조선인들, 취업사기나 어떤 사정으로 일본군의 위안부로 전락했던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한다고 하는 조선여인들, 일본강점기에 태어나서 당시대에 순응하며 살았던 조선인들, 누구에게는 친일부역자이나 누구에게는 애국심이 남못지 않았다는 상반된 기억을 동시에 투영 당하는 그 시대의 유명인들 모두는 실제 존재했던 사람들이에요. 친일과 혐일 사이는 어려운 사고를 요하는 것 같지만 우리네 삶이 본래 이래요. 단순히 친일이라고 매도하거나 맹목적으로 일본을 혐오하기란 쉽지만 그 편협성을 수정하고 실재하는 역사로 다시 복귀하는 사고의 전환은 힘들어요. 선별적인 서사로 쉬워진 사고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모두의 이야기를 접하고 경우에 따라 회색지역에서 숙고해 본다고 해서 과거청산이 불가능한 건 아닐 거예요. 


위안부할머니이슈 역시 어려운 사고를 요해요. 일본군에 의해 강제납치된 소녀라는 손쉬운 서사에 모두 익숙해져 버렸는데 수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선별적인 서사는 사실 불필요했어요. 당시는 1930-40년대였지요. 그 때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가 1980년대였어요. 시골에 살았던 터라 당시의 삶은 아주 손톱만큼은 수십 년 전 봉건적이던 한국의 모습에 가까웠죠. 시골아이들은 다들 가난했는데 가난한 줄 모르고 사는 아이들이 있는 가운데 그네들 사이에서도 유독 가난한 아이들이 또 있었어요. 그 중 한 여자아이가 실성한 듯 집밖으로 뛰쳐 나오고 학교 결석이 며칠 째 이어졌어요. 새엄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한 그 여아는 시골 온 학교아이들의 화제가 되었죠. 어린 나이에 모두들 그 아이를 깊게 동정한 기억이 나요. 새엄마의 구박을 받으며 거의 노예처럼 집안일을 했다고 하죠. 걔는 다른 마을에 살던 아이였어요. 


제가 사는 마을에는 정선이라는 같은 반 친구가 살았어요. 엄마아빠는 아마 초등학교 학력이 다였겠으나 닥치는대로 허드렛일을 하고 살림을 일구어 지금은 근사한 양옥집을 지어놓고 소도 많이 키워요. 정선이에게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는데 아들들에게 살가운 것과는 달리 어려서 정선이와 동네친구로 지내면서 정선이 엄마가 이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걸 잘 본 적이 없어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아직 치워놓지 않은 집안이며 다른 허드렛일에 대해 독촉하던 모습은 아주 익숙하게 떠오르는 기억이구요. 


우리 동네에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급생이 저와 정선이를 포함 4명이었어요. 정선이는 공부도 가장 못하고 아무도 딱히 좋아해주는 일이 없는 아이였죠. 심지어 그 시골에서 뱃사람이라고 하는, 우리가 결코 본 적이 없는 아빠를 둔 다른 친구가 새엄마와 지독히 가난하게 살면서도 정선이를 무시할 정도로 외면 당하던 아이였어요. 저는 정선이를 좋아했는데 나의 소울메이트란 생각보다는 정선이를 많이 동정했어요. 전 걔가 착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도 도와야 할 집안일이 많고 바쁜 아이였던 것 같아요. 동네아이들끼리 술래잡기를 한 기억 속에 정희는 자주 없어요. 모두들 개구지고 심술맞기도 한 아이들이었다면 정선이는 같은 아이인데도 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아 보이는 애였던 것 같아요. 걔도 며칠간 사라진 일이 있었어요. 실종되었다가 며칠만에 돌아온 정선이는 스님이 안위를 위해 절에 며칠 근신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절에 있다가 왔다고 했어요. 저는 어려서도 그게 어떤 핑계란 걸 감지할 수 있었어요. 정선이는 가출했다가 돌아온 거였다고 다른 친구가 얘기해줬어요.


몇 년이 지나, 집에 들어오는 일이 없는 뱃사람 아빠를 뒀다는 친구는 새엄마와 배다른 간난쟁이 동생과 같이 살았어요. 이 친구는 구박당하는 일이 없이 새엄마와도 잘 지냈고 동생을 잘 보살펴 줬어요. 아빠가 없는 집이라 가끔 동네아이들의 아지트가 된 이 아이의 집에서 애들끼리 노닥거리는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저는 도시로 전학을 가고 친구들의 근황을 알길이 없었는데 엄마가 지난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시곤 했죠. 친구의 뱃사람 아버지는 후에 다른 새색시를 뒀는데 언제나 욕정에 들끓던 이웃집 노인이 그녀를 겁탈하고 그녀는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이건 아마 90년대 일일 거예요. 


가까운 과거의 봉건적이던 한국시골에 대한 기억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별것없는 집안의 여자는 개돼지였어요. 어른들에게서 착취 당하던 아이들 중 남자아이들은 잘 없었어요. 흔한 풍경이었죠. 70-80년대만 해도 공장노동에 시달리며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조달해 주었던 많은 딸들이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요. 이런 봉건성이 1930-40년대에는 어땠을 것 같나요. 살상이 흔하고 이씨 왕조에 대한 가난한 민중의 증오심도 컸다고 하는 당시 사회의 야만성을 오롯이 감내한 건 힘없는 딸들이었을 거예요. 쥐뿔도 없는 취약층 가정의 여인들이 기생, 작부 모집에 솔깃했건 취업사기를 당했건 당시의 모든 각자의 사정이 어땠건 간에 '자발적, 비자발적'인 개인의 상황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었을까요. 


위안부이슈는 소녀가 아니면 덜 비극적인 게 아니에요. 내 핏줄이 아닌 일본인이 등떠민 함정이라고 해서 더 비극적인 것도 아니에요. 취약층 여인들에게 노출된 야만성과 궁핍 속에서 위안부가 되길 자처한 이가 있다면 그 길이 분명 덜 야만적이고 덜 궁핍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들의 믿음이 틀렸다고 해서 덜 비극적인 것이 아녜요. 그런 역사적 사실을 구술하는 할머니들을 누가 감히 비토하겠나요. 그 할머니들를 외면하고 쉬쉬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할머니들 모두가 소녀여야 하는 이유는 없어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는 지금과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었으니까요. 중요한 건 보수나 진보나, 조선여인들이 전장의 일부가 되어 끔찍한 인권유린을 당했다는 것과 일본군의 동지가 되길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많이 없다는 거예요. 그치만 멀지 않았던 옛날 한국 가부장들의 사고, 일베로 이어지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소녀상의 서사와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곡해가 두려운 대중의 공포가 아직은 사회를 압도하는 것 같아요. 그건 옳지 않은 공포예요. 위안부할머니들의 역사를 직시하며 불안한 당신은 왜 비극 앞에서 불안한가요.

"Somewhere unwritten poems wait, like lonely lakes not seen by any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