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내가 하지 않더라도 어떤 똘아이 하나가 곧 퍼올 것 같기에 그냥 내가 먼저 해 봤습니다. ^^

읽고 난 감상은...

1. 이 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자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도다 ㅋㅋㅋ

2. 전형적으로 대가리는 텅 비어있고 염통은 정상인의 열 배쯤 부풀어 있는 자로구나. ㅋㅋㅋㅋㅋ

뭐 대충 이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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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의 성명서] 박근혜 이재용은 무죄입니다 
-재판부에 보내는 탄원서

다수의 횡포는 종종 법과 제도에 올라탑니다. 로크가 일찍 경고했듯이 사회적 폭정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일상생활의 내부로까지 침투하여 개인을 말살하고, 기어이 양심을 녹여버리는 그런 힘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당한 질문이 답을 얻지 못해도 더는 호소할 곳이 없고, 논리가 막혀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의 조작된 편견만이 지배적 담론으로 행세한다는 사회라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법정은 이미 그런 압력에 노출된 지 오래이며 이는 근엄한 판사의 세계에서조차 예외가 아니겠지요. 아니 폐쇄된 공간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더한 압력이 휘몰아치겠지요.

지금 박근혜와 이재용을 처벌하겠다는 검찰의 기소가 바로 그렇습니다. 진실은 진실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일견 준엄하게 포장된 기소장에서도, 그리고 결코 감출 수 없는 언어희롱일 뿐인 공익의 대변자라는 검찰의 논고문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됩니다. 특검은 그토록 길고 거친 수사과정을 거치고도 결코 그 어떤 것도 증명하거나 논증하지 못했습니다. 특검이 12년이라는 긴 감옥 생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재용을 탄핵한 긴 논고문도 실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백이요, 실언이며, 고백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특검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방불하는 소위 촛불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충실한 역할극을 해내고 있을 뿐일까요. 문화혁명의 재판정에서 검찰의 역할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지만 영혼은 썩어있고, 깡통을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진실의 견고한 성채를 결코 뚫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휩쓸고 지배한다고 해서 모두 공의요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특검으로 대표되는, 무지와 그것에서 더한 에너지를 얻는 일방성과 거친 폭력이 내재한 집단사고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지배 이데올로기를 살아내고 버텨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는 종종, 아니 필연적으로 대중독재의 거친 호흡을 뿜어내는, 각각의 국민에게 주어지는 땀 흘리는 고갯길을 넘어가야만 합니다. 지나간 20세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보아왔던 것들 대부분은 인간을 지배하고 파괴하려는, 인간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욕망이었습니다. 그 악의 힘은 언제나 민중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우리가 목도한 광장의 촛불은 실은 횃불의 전조요 감추어진 폭력이 은폐된 위선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누구라도 진실을 말하고 진실의 편에 가담하는 순간 당신도 소외된 자, 박해받는 자, 동떨어진 자, 그리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역사는 종종 그런 시대를 우리 앞에 펼쳐놓고 우리를 조롱하고 시험하는 것같습니다. 하나의 지배적 광기가 광장에서 세력을 얻고 나면 우리가 그토록 만들어내고자 애를 써왔던 독립적 개인들의 공화적 국가는 일순간에 집단의 지배에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아, 바로 이런 시대에 판사가 되어 재판정에 우뚝 선 하나의 양심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두려우며 또 위험한 것입니까.

우리는 부득이 선택해야 하고 이 선택은 지극히 조심스럽습니다. 선택은 무엇보다 박해에 대한 불안을 동반합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공포는 비교적 오래된 것이고, 잘 알려져 있던 것이며, 우리가 쉽게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온 그런 종류의 공포입니다. 밖으로는 세계적 간접경험들이 쌓여 있고 안으로는 개발연대의 그 강고한 독재적 사회구조를 우리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막상 당하고 보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양심의 가치를 선선히 독립적으로 세우기가 어렵고, 진실을 판독하는 눈이 흐려지며, 간사한 악마의 속삭임 즉, 사악한 핑계거리들만이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재판정이 유죄의 티끌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칠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허약한 인간들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을 헌법재판소 심리과정에서도 잘 보았습니다.

사회적 압제는 정치적 압제보다 더 은밀하고 무섭습니다. 나치도 스탈린도 이 사회적 압제라는 기제를 이용하여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을 다스렸지요. 일단 다수를 차지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다수의 횡포가 일상화하기 때문에 정치적 소수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켜나가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사회적 압제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피신처조차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 광기는 대중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도피할 곳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부상을 알아채기도 쉽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캄보디아에서 이미 그 존재를 입증했던 대중독재의 공포가 마치 1인 개발독재의 ‘지연된 후폭풍’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두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아, 민주주의라는 것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입니까.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진리가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은 오히려 소수자의 편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대중들이며, 그것에 현혹되지 않는 소수는 지금은 거리에서 밀실에서 조용히 밀려오는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성이 마비되지 않았기에 그들 중 일부는 간신히 진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나의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기정사실이 되고, 허구의 이미지가 진실인 것처럼 견고한 성벽를 쌓아 올립니다. 저급한 그리고 추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극화된 궁중 스토리(fact) 하나가 마치 진실처럼 그리고 딱딱한 ‘사실인 증거’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조작된 증거의 편린들이 쌓여 기어이 “무죄라도 단죄할 수 있다는” 집단의 용기를 끌어올리는 대중의 무모함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공개 재판의 악마적 장점은 그런 것입니다. 한국의 사법부는 그런 공개 재판을 허용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이 사건 재판관들에게서 그나마의 독립 자존적 양심의 공간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대중들은 유죄의 증거를 더욱 광적으로 확신하며 무죄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보십시오. 저, 중세적 마녀 재판들과,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호통소리 치는 전근대적 정치 판관들을 말입니다. 그런 무대장치가 이 시대에 또 필요한 것이었던가요.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합니다. 대중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만들어 내는 고독감 혹은 공포감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이 유사한 단일 그룹에 속한 한명이라는 것에서 대중 정치형 인간들은 비로소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대중의 범죄는 결코 단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대중은 익명 속으로 도망치기 때문에 아무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국민은 그 전체로 언제나 옳다는 식의 논리는 대중들에게 무모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합니다. 오류를 면죄받기 때문에 대중들은 누구라도 익명 속에서 잔혹함을 즐기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혁명과 킬링필드의 개인 그 누구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이런 오류들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개인이거나 진실된 자유인은 대중 사회 혹은 사이비 민주주의를 견뎌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는 종종 다수의 힘으로 내리누르거나 소위 지배적 의견을 내세워 소수의견을 박해하고 소수를 축출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아니 그런 힘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동정 공감하는 존재라는 명제는 종종 공감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차가운 배제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두려움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이라는 종에 내재한 위험성이요, 제한성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종종 생각이 다른 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그리고 배제적인 행동에 나섭니다. 법정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그 집단의 우매함에 선을 그어 자유 이성의 보루를 지켜내자는, 그리고 냉정하게 제어하자는 진실을 지키는 공간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정이 정치를 차단하여 정의의 깃발을 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줄기 자유의 공기를 숨 쉴 수 있게 됩니다.

박근혜 탄핵은 곧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안티테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된 진실이 황금 송아지처럼 주조되고 사람들은 굳은 확신으로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확신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구체적 증거물입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데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한가를 지금 특검은 재판부에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증거 없이도 논고하고 객관적 사실의 뒷받침 없는 상태에서도 박근혜와 이재용에게 제멋대로 중죄를 선언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치는 법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 대한민국 법정이 증언하고 있는 것인가요?. 자부심이 넘치는 재판관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대법관이 머지않아 전원 교체되고 헌법재판소가 영욕을 다투며 판사도 한낱 정치적 임기 내에서 움직일 뿐이라면 우리가 호소할 보편의 법정이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에 대한 탄핵의 기초 위에 성립한 정권입니다. 박근혜의 범죄가 성립해야만 문재인 정부는 비로소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박근혜의 범죄라는 것이 소명되지 않거나 그것이 위조 혹은 조작에 의한 것 다시 말해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거나 입증되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면 문재인 정권은 그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됩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문재인 정권은 스스로 권력을 내어놓고 물러나야 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더욱 강력한 목소리로 사건을 단정하고 확신하고 예수를 처단하기를 원하던 바로 그 목소리만큼이나 강력하게 확신에 차서 유죄를 단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범자의 연대의식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들이 광장민주주의에 찬성하지 않는 우리들을 시대착오적 반민주 세력인 것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듯이 우리는 그들을 광장의 악인들이며 만들어진 범죄의 바로 그 공범자라고 부르기를 역시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민중이며 국민입니다. 모택동의 주술에 걸려들었던 그 수많은 광기의 자식들입니다.

판사 한 사람에게 불완전한 논증의 책임을 모두 지우는 일은 실로 고약한 일입니다. 개인은 진리보다 약한 존재이며 누구라도 진리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보편적 양심 그 자체에, 우리의 마지막 명운을 걸면서, 이 증거조차 빈약하기 짝이 없는 ‘만들어진 범죄’의 무죄 선언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파가 선 자리는 벼랑 끝처럼 위태롭지만 인간은 어차피 벼랑에 난 길을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판사란 존재는 더욱 그런 운명에 노출되어 있고, 오히려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러니 절벽 위로 난 길을 걸어갈 것을 모처럼 스스로에게 요구해 보십시다. 우리의 맹세는 허공을 떠돌지라도, 우리의 고함이 계곡 저 아래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더라도 오로지 우리 자신만큼은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범죄는 조작되었고 편집되었습니다. ‘아무도, 어느 것도 주고받은 적이 없는’ 그런 뇌물죄라는 것이 과연 성립한다는 것인지요. 누가 누구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인지. 부풀려지고 짜깁기된 그런 범죄로 무너질 만큼 대한민국은 하찮은 국가인가를 지금 우리는 묻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연적 질서 그대로, 법치 그대로, 정연한 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순간은 정녕 오지 않을 것입니까? 아니 그 순간이 마치 구름이 걷히듯 우리 앞에 선연히 나타나는 그 순간을 위해 노력하십시다. 마치 잘 닦여 깨끗한 거울을 마주 보듯이 진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싸워나갑시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 속에서 자라나고, 점점 커지고 있는 공포를 이겨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에게 뒤집어 씌워져 있는 뇌물수수라는 기상천외의 기소사실은 반드시 부정되어야 합니다, 무죄로 선언되어야 합니다. 아니 저는 그들의 무죄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무죄입니다.

2017년 8월 9일 정규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