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법의 전두환 회고록 출판/배포 금지 명령의 부당성


                                                                     2017.08.08



지난 8월 4일, 광주지법은 전두환 회고록이 “5ㆍ18을 왜곡하고 관련 집단과 참가자를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나 평가를 저해했다”고 밝히면서 5ㆍ18기념재단, 5월 3단체(유족회ㆍ부상자회ㆍ구속부상자회), 고 조비오 신부 유족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출판사 자작나무숲 대표인 아들 재국씨를 상대로 낸 회고록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왜곡한 33곳에 대해 삭제하지 않고 출판 배포할 경우 회당 500만원을 이들 단체에 지급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회고록이든, 어떤 문건이든 사실과 다른 것을 적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며, 합리적 의심을 할 정도의 근거가 없는 의혹 제기도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전두환 회고록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삭제를 명령하는 광주지법의 판결에 동의할 수 있으나, 사실관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거나 사실인 경우를 5.18 단체나 유족들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면 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전두환 개인의 주관적 해석이나 판단은 표현의 자유로서 보호해 주어야지 5.18 단체나 유족들의 해석과 판단과 다르다는 이유로 삭제를 명령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저의 관점에서 전두환 회고록 33곳의 내용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한 광주지법의 선고가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한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삭제 명령을 받은 33곳의 내용(5가지로 대별)을 시사저널이 정리해 놓은 것이 있어 이것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69763



1.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535쪽 외 18곳)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무릅쓰며 싸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었듯이 5.18사태 당시 정부와 계엄군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무장혁명 세력과 맞섰던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이 오래지 않아 명백히 밝혀질 거라 믿는다.(535쪽)

지만원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541쪽)

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531쪽)“


저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5.18 현장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현재 북한의 군 고위직 인물과 동일하다는 지만원이나 뉴스타운의 주장(소위 ‘광수 놀이’)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라 전두환 회고록의 이 내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최근 탈북자 중에 5.18에 가담했다는 사람의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고, 그 동안의 검찰, 국방부, 국회 청문회 등 5차례의 5.18 조사보고서 어디에도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우리 정부도 공식적으로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북한군 개입설은 낭설이라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전두환은 1년 전 2016년에 월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 사실을 듣지 못했고,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그런 정보를 접하지 못했음을 밝힌 점에서 이 부분은 자기 모순을 드러내는 서술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군 개입 의혹을 전두환이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근거가 있는 합리적 의혹이라 볼 수 없어 이 부분에 대해 삭제 명령을 한 광주지법의 조치는 문제 삼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2.헬기 기총 소사 여부 (379쪽 등 4곳)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379쪽)

이러한 주장(피터슨 목사와 조비오 신부의 헬기기총소사 목격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480쪽)“


이 부분은 전두환 회고록 내용이 사실과 부합함으로 광주지법의 판결은 부당합니다.

5.18 관련하여 1980년 5.18 당시, 1985년,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1995년, 그리고 노무현 정부 시절 총 5차례에 걸쳐 검찰, 국방부, 국회의 조사가 있었습니다만, 조사보고서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고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 중에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부정축재 및 5.18의 주범으로 처벌하려 할 때 검찰과 국방부가 합동으로 5.18에 대해 재수사한 조사 보고서(‘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년 7월 18일 작성)를 광주지법의 결정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아래에 1995년 검찰과 국방부가 합동 수사한 조사보고서를 링크합니다.

http://m.blog.naver.com/codevvip/120210831234

1995년 보고서에 나오는 헬기 기총 소사와 관련한 부분을 그대로 복사해 아래에 옮깁니다.


헬기 기총 소사 여부 : P207~210)

당시 육군항공단 근무 관계자들은 .... 그러한 사격을 실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군 관계자료상으로는 실제 공중 사격 실시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할 수 없음.

이광영이 헬기 사격으로 여학생이 어깨 부위를 피격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당시 적십자병원의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그 당시 헬기 사격 피해자가 내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없었고,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 사격에 의하여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 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을 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이 심동선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 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건물 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증언(광주오월항쟁사료전집 714쪽)도 있으며,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 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 사격 자체는 목격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동인이 사격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 사격시 발생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되었고,

그 밖의 목격자들도 막연하게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사실을 진술하지 못하고 있는 바,

광주시내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전남대학병원의 당시 각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 보아도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내원하였거나 입원, 치료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중략) 7.62밀리 6열 기관총(분당 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 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의 인명 피해와 뚜렷한 피탄 흔적, 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고,

(중략) 실제 다른 사례에 비해 광주지역에서 유류나 탄약을 많이 소모했다는 것이 아닌 점에 비추어 헬기 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인명 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음. 


위와 같은 1995년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광주지법이 사실관계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일방적으로 5.18 단체나 유족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여 삭제를 명령한 것은 부당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3. 의도적이고 무차별한 살상행위는 없었다(382쪽 등 3곳)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382쪽)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383쪽)

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27쪽)“


이 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1995년 조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전두환 회고록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어 저런 표현을 썼다고 삭제를 명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아래에 이와 관련한 1995년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발췌해 올립니다.


발포 경위 : P197~201   

위와 같은 발표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 없을 것임.(P199)


다만, 고소, 고발인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이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고아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장갑차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P200)


5/20 20:00경 시위대 3천여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10경 노동청 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붙였으며,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저지선을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음.(P84)


5/21 20:00경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러 보내고 트럭, 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최루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고, 22:00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음.(P87)


5/21 20:00경 고속도로 쪽에서 차량 1백여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몰려와 공방전을 벌였으며, 16대대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대들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여 소강상태가 유지되던 22:00경 갑자기 시위대의 11톤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하였음.(P87)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하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22: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하여......(P88)


5/21 도청 앞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칼빈 소총을 든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를 비롯한 트럭, 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전면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 강구를 건의하였으나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만 반복하였고, 11:00경 63대대장은 대대장 짚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을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P98)



4. 5∙18과 관련된 회의를 비롯해 어떤 과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27쪽 등 7곳)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재임 시 그 어떤 작전지휘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440쪽)

5.18사태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384쪽)“


이 부분 마찬가지로 전두환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음을 1995년 조사보고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5.18 당시 현장에 나와 지휘한 적도 없으며 지휘 라인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조사보고서 어디에도 전두환이 5.18 진압에 개입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2016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계엄 사령관으로서 5.18 진압을 지휘했고 전두환은 지휘 라인에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해당 부분의 1995년 조사보고서 내용입니다.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 이원화 여부 : P201~204

(중략)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이 결정된 사실이 인정되며.....(P202)



5. 집단발포 직전 시위대의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이 사망했다(470쪽)


“오후 1시경 시위대는 장형태 지사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음에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데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측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원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지부 건물 등으로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470쪽)”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두환 회고록이 사실에 부합함을 1995년 조사보고서가 보증하고 있습니다. 회고록의 내용은 1995년 조사보고서를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처럼 거의 똑같습니다. 아래에 1995년 조사보고서에서 이 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그대로 복사해 올려놓을 테니 회고록의 내용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5/21 12:00경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을 저지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백여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하여 서로 10미터까지 접근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13:00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하였고,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의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 발포가 되었고, 도청직원들이 선무활동의 일환으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쪽으로 돌진해 오자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에 발포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 장갑차와 다른 차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 나갔음. (P99)



상기에서 살폈듯이 광주지법이 사실을 왜곡했다고 삭제를 명령한 5가지의 사항(33곳) 중에서 북한군 개입 주장만이 사실과 다를 뿐, 나머지 4개 사항은 사실과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주지법은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을 받아들이고 33곳의 삭제를 명령할 수 있나요? 이 지경에 이르면 표현의 자유를 다투는 것은 차후의 문제가 됩니다. ‘진실여부와 무관하게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다툴 이유도 없는 것이죠. 광주지법이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임으로 논쟁도 필요 없으며 이론의 여지도 없습니다. 명백한 광주지법(판사 박길승)의 잘못된 판결입니다.

이미 1심 판결이 났으니 어쩔 수 없지만 2심에서는 1심의 판결이 번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광주지법의 판결과 같이 5.18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5.18 정신을 오히려 훼손하는 움직임은 1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국민의 당의 박지원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과 제창을 법제화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비방, 왜곡, 날조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발의했고, 이에 38명의 국민의 당 의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으며, 조선대, 전남대 교수들도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이런 법안 발의와 동조 움직임은 비민주적 전체주의적 발상이며,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다면적 역사 해석을 봉쇄하고 획일적 규정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보아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이런 저의 해석을 절대화하거나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5.18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폭동으로 보는 견해마저 있습니다.

5.18과 관련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많아, 한 일방의 일방적인 규정이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자칫 사실관계가 왜곡되고 과장된 상태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굳어질 우려도 있어 국민들이 5.18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5.18의 실체적 사실 규명이나 재해석의 연구마저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이런 법은 반민주적이며 양심과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5.18을 성역화, 절대화하거나 다른 시각의 해석을 원천 봉쇄하려는 법제화 움직임 자체가 5.18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박지원이나 광주지법 박길승 판사, 5.18 관련 단체 등 5.18을 절대화 하려는 세력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5.18에 대한 국민들의 컨센선스(consensus)나 대한민국 국가 차원에서의 평가와 규정은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알려지고, 이해당사자들이 돌아가신 후에 객관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그 전에 섣부르게 한 일방의 평가와 규정을 절대화할 수 있는 법제화는 반대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향해 - 풀은 역사 위에 어떻게 자라는가

저는 5.18 관련한 문화상품(영화, 연극, 문화제, 회고록 등의 책)이 나올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치유와 화해를 위한 작품들이 나올 때도 되었는데 5.18의 비극을 극대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심한 작품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5.18도 올해로 37년이 되었습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여전히 한으로 남고 뼈에 사무치는 기억일 테지만,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기 위해 이젠 역사의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말초적 증오와 분노에서 벗어나 용서를 위한 준비를 하고, 5.18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들 모두 새길 수 있도록 차분히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함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나찌당의 본거지였던 뮌휀의 쾨히니 광장 자리에는 지금 미술가 ‘카스트너’의 <풀은 역사 위에 어떻게 자라는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33년 나찌가 퇴폐적이라고 낙인 찍은 작가들의 책들을 불살랐던 광장에 ‘카스트너’가 그 자리를 불살라 재로 만든 후 어떻게 풀이 자라는지를 관찰하도록 하는 작품입니다.

과거를 상기하고 잊지 않도록 하되, 미래 세대가 그 의미를 찬찬히, 그리고 되씹게 하는 것으로 세련되기도 하여 한참을 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그 작품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는 5.18의 실체를 제대로 알았을 때 반사적으로 일어났던 5.18에 대한 다소 부정적 생각들(본질적인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지만 그 반사적 강도가 강해 본질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에서 벗어나 다시 차분히 5.18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