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철학, 심지어 과학도 '나는 누구인가'부터 알아야 올바른 이해, 올바른 활용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읽는 것도 '나'고, 해석하는 것도 '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모르면 읽어도 읽은게 아니고, 해석도 엉뚱한 것이 되며, 옳고 그름의 판단도 그게 진짜 옳은지 그른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아세요'라고 말씀하셨죠. 나부터 알고나서 인문학이든 철학, 종교, 과학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음> 결국 득도하면 그리 하겠지만, 그런 경지는 극소수만 도달하는 것 아닐런지요?

그러나 득도라고 해서 반드시 어려운 고행이 필요한 그런 득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극소수도 아닐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견성'이라고해서 본래성품을 본다는 말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은 경지를 표현합니다.

견성이란 물질로서는 생명들의 공동체로서 나를 인식하는 일이고, 마음의 차원에서는 내 마음, 네 마음이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머무는 바 없이 흘러가는 것이 마음의 성품임을 아는 일입니다. 이처럼 물질적이고 영적(마음)인 존재로서 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보통사람들이 나는 윤민우다 라고 이름에 집착하거나, 나는 잘생겼다 못생겼다 하며 모양에 집착하거나, 나는 고관대작이다 거렁뱅이다 하는 사회적 위치에 집착하거나, 나는 슬프고 기쁘다고 하는 감정을 나와 동일시 하는 식의 대답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선사들은 '손가락 하나를 척하고 들어보입니다'. 또 다른 선사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짝하고 내리칩니다. 어느 선사는 '차 한한 하시게'라고 합니다. 인문적 소양, 문해력, 이해력 등등 어떠한 사량적 노력으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답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나란, 본래부터 수많은 생명체를 살리는 공동체의 군주이고, 나만의 마음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 한마음으로 마음씀씀이 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죠. 그러니까 생각내기 이전, 존재가 본래 생겨먹은 대로의 나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존재'로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모두를 잘 사랑하기 위해서 인문학도 배우고, 철학을 하고 종교를 믿는 것 아니겠는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본래 생겨먹은 모습이고, 단순한 호기심의 충족을 넘어서 '사랑의 실천'이라는 본래 면목이 하고자 하는 바에 부합되는 올바른 지식과 지식의 활용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