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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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 했지만 매트릭스는 파고 들어갈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지난 번 글에서는 막시즘과 실존주의의 시각에서 매트릭스를 읽어 보았다. 막시즘의 관점으로 본다면 네오는 혁명의 '메시아'가 되어 모든 인간이 포기한 삶의 의미를 '진실의 사막'에서 찾아내었다. 자본주의가 주입한 모든 환상을 뒤로 하고.
그가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재림 할 운명의 메시아임을 예언자(오라클)가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오는 이야기한다.
난 운명을 믿지 않아. 내 운명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데 오라클은 네오가 The One이 될 운명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그럴 재능이 있는 인간이지 '그'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다음 생에서-트리니티의 사랑을 확실하게 얻는다면-네오는 "그"가 될 수 있다고 했다.이말은 글자 그대로 실현된다. 네오는 죽고 다음 생에서 트리니티의 사랑고백을 들은 후'그'가 된다. 영화가 끝난 지금도 네오의 운명관은 여전할까? 여전히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운명론을 싫어할까?
자유의지 VS 운명
예전에 스위스에서 신정정치를 펼치며 인문주의자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신학자마져 박해하신 유명한 종교개혁가 어른이 계신다. 칼뱅이라는 어른인데 이름처럼 좀 꼴통스러운 양반이다. 이 양반의 이름을 사해에 울려퍼지게 만들고 울나라 고딩의 교과서에도 오르내리게 만든 학설이 있다. 이른바 '예정설'.

예정설로 스타가 되신 칼뱅아자씨-그림만 봐도 상당히 물샐틈 없이 완고해 보인다.
"우리는 신의 이러한 영원한 섭리를 예정predestination이라 부른다. 그는 그것에 의해 모든 인간 개개인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들이 모두 비슷한 운명으로 창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삶이라는 운명이 예정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어 있다."
장 칼뱅, <기독교의 원리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네오는 자유의지로 빨간약을 택했다. 그리고 기꺼이 매트릭스와 맞서 싸울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물어보자. 만일 그것이 네오의 운명이었다면, 혹은 매트릭스2에서 설쩍 비춘 것 처럼 그것이 매트릭스의 프로그램에 의하여 미리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도대체 네오의 자유의지는 어디로 간 것인가?
운명이라는 단어의 뜻과 자유의지는 뜻은 명백하게 상호모순을 이룬다. 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全知(그의 운명을 미리 정하고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하다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신은 전지하지 않으며 신이 만든 운명과 예정론은 헛소리가 된다. 다시말해 운명과 자유의지는 동그란 사각형처럼 형용모순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세계관을 대표한다.
신은 논리적 규정을 확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전능'하다고 일찌기 토마스 아퀴나스 옹께서는 말씀하시면서 슬쩍 이 논리적 모순을 넘어간 바가 있다. 이럴테면 이런 식이다. 신께서 전지하신 것은 신께서 전지하다고 정해진 바 내에서만 전지하시다. 신계서 자유의지를 내리셨다면 그 범위 안에서 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 설명이 충분히 납득가능한가? 상당히 미진하기 그지없다. 이럴때 종교인은 흔히 터툴리안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하며 자신의 믿음을 다질 것이다.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 저 명제는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로 들릴 가능성이 높다. 일반인들은 모순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생각할 뿐이니까.
그렇다면 매트릭스는 운명론과 예정설을 주장하는 종교적 텍스트일까? 그렇지가 않다. 매트릭스의 텍스트를 보면 운명론이 아니라 훨씬복잡한 이론들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예를 들어 테어도어 시크 주니어(Theodore Schick Jr-뮐렌버그 대학의 철학과 교수, 슬라보 지젝등과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Matrix & Philosophy]를 공저함)는 오라클은 결국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물, 프로그램, 네오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미래를 실현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아주 거대한 펀드를 운영하는 유능한 펀드매니저처럼 자신이 가진 정보와 자원을 활용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이고 그 가능성을 예측하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전히 미진하다. 설마 오라클이 그러한 존재에 불과할까. 네오의 육체적인 삶의 죽음까지 예언하는 그녀의 능력를 펀드매니저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스켑틱한 해석이고 영화가 풍기는 이미지와도 맞지 않다.
테어도어는 에피쿠르스가 예측한 원자의 불규칙적인 방향전환을 현대의 입자론, 혹은 양자론과 연결시키면서 결국 결정론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오라클은 어떻게 미래를 예언하고 실현한다는 말인가? 양자론, 카오스이론,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국 결정론을 붕괴시키는 역할을 하게되는데 그렇다면 오라클의 '예언'과 그 신비적인 실현은 뭐지? 영화는 영화일뿐?
지난번에 포스팅한 매트릭스 읽기를 내가 속한 동호회에 다시 포스팅했더니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한다.
매트릭스는 워쇼스키형제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비평가들이 제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구. 영화는 영화일뿐인데.... 과연 그럴까?
슬라보 지젝은 매트릭스를 일종의 철학자을 위한 로르샤흐 테스트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정말로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라는 이야기다.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자대로, 인공지능전문가는 인공지능전문가대로, 지젝은 라캉의 이론으로, 그리고 나같은 좌파는 좌파의 이론으로 이 영화에서 이것 저것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워쇼스키형제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 영화는 이미 복합, 퓨전, 포스트모던적인 텍스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형제는 그 평자의 생각보다는 상당히 똑똑한 인물들이고 대사들로 볼 때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인간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형제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고 자신들이 참고한 다양한 텍스트, 기존의 영화들이 이 영화에 녹아있고 그 녹아있는 구성물들은 한없는 해석과 재발견, 그리고 재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매트릭스의 의미를 다시 찾아 보자.
현대물리학자라면 매트릭스에 나오는 네오의 운명론, 오라클의 예언을 들으면서 쉽게 양자역학의 이론을 떠올리게된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의 결과에는 관찰자의 시각이 영향을 미치게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관찰자가 보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라클은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사건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저지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렇게 개입했고 그리고 성취했다!
오라클 : "화병은 신경쓰지마."
네오 :"무슨 화분..."(화분을 찾으러 주위를 둘러보다 화분이 깨진다."
네오 : 죄송합니다.
오라클: 신경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보다 궁금한 것은 내가 화병을 언
급하지 않았다면 화병이 깨어졌겠냐는 것이겠지.

오라클-귀걸이가 태극문양이다...그녀의 신비주의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물론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화병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건의 예언자가 아니라 사건을 이루어지게 만드는 촉발자(initiator)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결정론이 아니라 자유의지, 그리고 운명론이 아니라 미래라는 것은 개척된다는 프래크머티즘적인 시간관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이렇게 본다면 양자론이 개입되어 있다 뿐이지 펀드매니저이론과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네오의 미래를 예언하고 성취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불확정성이론으로 볼 때 주사위놀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천문학적인 확률의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었고(그녀의 정보와 능력으로 보았을 때 일반인보다는 훨씬 더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었겠지만)네오의 재능으로 기적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이루었다는 말인가?
여기 슈뤼딩거의 고양이, 평행우주론, 인과결정론, 연기설, 양자역학을 묶어주는 아주 참신한 모델이 있다. 이런바 게임CD 우주론이 그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주 시공연속체(space-time continuum)를 하나의 게임시디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게임의 플레이어라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혹은 트랙리딩에 따라 게임을 순차적으로 클리어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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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라는 것을 이 한장의 게임시디라고 생각해 보자구...
자 그런데 각 상황별로 당신이 어떤 변수를 선택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프로그램 개발자라고 할지라도. 그런데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결말은 몽땅 시디안에 들어가 있다. 다만 당신은 당신이 택한 선택에 따라 어떤 어떤 결과를 체험하게 되고 어떤 결말은 체험하지 않게 된다. 우주라는 프로그램의 개발자(다른 말로 창조주, 프리메이슨의 용어로 하자면 우주의 건축가), 혹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래머, 혹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 오라클은 당신의 어떤 선택을 유도할 수는 있을 테고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불 보듯 뻔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렇다면 그결과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전지'하다. 다만 어떤 체험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본인이다. 그것만은 아무도 우리에게 강제할 수는 없다. 유도하거나 추천할 수는 있을지라도.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신은 우리자신의 결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그 결정의 결말은 모두 알고 있으며 심지어 결정을 내리지 않은 순간의 모든 경우의 수- 이경우 무한한 경우의 수-의 결과도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은 전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택하지 않은 선택은? 우리에게 다가 오지 않았을 따름이지 이 우주라는 시디에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고양이를 죽일지 살릴지(체험을 실현시킬지 말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고 그전에는 이 세상 모든것은 존재와 비존재 그 사이의 어떤 형태, 혹은 리딩되지 않은 시디트랙처럼 존재하는 것이다(슈리딩거는 고양이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상자를 여는 순간 둘 중의 하나의 형태로 결정된다고 말한다).
평행우주론으로 나아가보자. 휴 에버릿은 양자가 나뉘는 것 처럼 우리가 매 순간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에 따라 우주가 쪼개져서 다른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매순간 우주는 무한한 경우의 수로 나뉘어져 무한한 차원으로 동시에 물질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황당무계하기 그지 없지만 양자역학이라는 넘이 워낙에 상식을 깨는 이론이므로 이 이론 역시 양자역학의 한 해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게임시디이론은 이 평행우주론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다. 물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매트릭스 2 리로디드를 보면 네오가 아키텍트를 만나는 순간 각각의 모니터에 수많은 네오가 수많은 형태로 아키텍트를 만나는 장면이 비춰진다. 유일 무이한 The One이 아니라 수많은 The One이 각각의 순간에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면서 아키텍트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 세계의 The One인 네오는 결국 이 모든 경우의 수 중 한가지라는 이야기다. 이 놀라운 장면에서 네오는 그다지 경악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도 별로 의아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 장면의 함축성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았기때문이다.

아키텍트와 모니터링되는 수많은 네오들....
결국 의미를 실체로서 드러내는 The one은 네오일뿐이지만 수많은 다양한 가능성이 동시에 다른 트랙에는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워쇼스키형제는 관객이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한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이보다 더 재미있게 평행우주론, 혹은 게임시디 우주론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고 장담하고 싶다.
다시 칼뱅의 예정설 그리고 ....
"우리가 예지를 신의 속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의 눈앞에 만물이 계속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은 미래이거나 과거가 아닌 현재이다. 즉 그는 만물을 자신의 마음에 형성된 생각들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만물을 정말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러한 예지는 세계 전체,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해당된다."
-장 칼뱅, 앞의 책
어떤 의미에서 칼뱅 아저씨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새로운 모형에 따라 신을 이해해보면 우주라는 게임의 프로그래머인 신은 모든 시간에 걸쳐, 모든 공간에 속한 모든 피조물의 자유의지가 결정한 모든 결과를 '현재' 속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라는 게임시디, 혹은 시공 연속체 어디에나 랜덤액세스가 가능한 프로그래머로서 말이다. 칼뱅은 신은 시간과 우주의 외부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전지전능의 절대자로 파악했으니까 이 개념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다는 말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한 측면은 네오도, 현대물리학자도 인정할 수 없겠지만.
물론 게임시디모형도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고 진실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뱅 아저씨의 완전 예정설보다는 양자역학과 불확정성의 등 현대물리학이론에 좀 더 부합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매트릭스를 따라 토끼굴에 머리를 들이밀면 세계는 더욱 신비롭고 복잡해 진다. 빨간 약을 택할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세계는 언뜻 언뜻 자신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젝은 빨간약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실재의 사막"을 발견한다고 하니 진실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빨간약을 선택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아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울러 해박한 지식에도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요
깔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예정론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부족한듯 합니다
깔뱅의 예정론은 하나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다섯가지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있고 흔히 5대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깔뱅의 주장은 신은 태초부터 유기할자와 구원할자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미리 알고 선택했다는 예지예정론과 그냥 선택했다는 예정론이 나누어지는데요
사실 이 예정론은 바울 그리고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신학사상입니다
깔뱅의 예정론은 순수 에정론입니다
깔뱅의 예정의 전제는 애초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잘 못된 선택권을 하기 때문에 이미 버림받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유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의 운명은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버려질 운명인데 그 중에 신의 의지에 따라 일부를 구원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랑할 것이 없게 하려는 전적인 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심술쟁이냐?
아니면 타락 할 것을 알고도 왜 그랬느냐라는 물음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일단 인간에게 기회를 주었고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에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로 회피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즉 내가 구글을 통하여 누구를 추적하려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거나 알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일부러 자신을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예정된자가 누가 유기될지는 아무도 모르며 구원받을 자는 거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되고 그것이 구원받을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며 구원받을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이 예정론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아울러 터틀리안의 말을 인용했지만 그보다는 안셀름이 말한 나는 알기위해 믿는다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신의 시각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의미가 없습니다
신에게는 카이로스로서의 시간과 크로노스로서의 시간이 같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시간론에서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를 말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과거가 되고 현재라는 시간은 그 시간 현재이고 미래는 곧 현재가 되기 때문이지요
즉 실제적으로 이세상에는 현재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신에게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잇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수십키로 반경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먼 거리를 동시에 볼 수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를 동시적으로 우리는 파악할 수 있지요
그러나 땅에서는 서울에서 인천까지의 거리상에서는 시간적으로 파악됩니다
즉 시간적인 흐름은 간격이 있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지만 공간적으로 볼 때는 동시적이고 현재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적인 신도들은 종말의 날자를 시간의 흐름으로 이해해서 몇년몇월 몇일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떠들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단에 속한 사건입니다
예를 들면 컵에 물이 넘치게 하려면 물을 부어야 하는데 그 물이 넘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물을 붓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컵에 물을 조금씩 부으면 늦어지는 것이고 빨리 부으면 빨라지는 것입니다
딩에가 아닌 폴엔딩으로서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조건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종말이지 어느날 어느시간이 정해져서 종말이 오는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좌우간 영화 하나가지고도 양자물리학 우주론 평행이론 신학의 예정론등등을 끄집어 낼수 있고 그것을 술술 풀어가는 코지토님의 지식과 글솜씨에도 감탄을 합니다
저야 칼뱅 전공이 아니라서 전문적인 지식은 없으니 님의 첨언이 고맙네요.
다만... 전지전능한 신이 자신의 전지를 제한한다는 개념은 본문에서도 적었다 시피 토마스아퀴나스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전지한 신이 자신의 전지함을 제한 할 때, 그때 그 신은 전지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철학적 논쟁이 생기죠. 이 주제는...사실 논리학의 자기조회모순과도 비슷합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자기 자신의 능력을 제한 못한다면 그건 전능하지 않지 않느냐... 그런데 제한하면 그 순간 전지전능하지 못한 거 아니냐..... 이 주제로 러셀이 아주 유명해 졌죠. 이른바 러셀의 역설.
신이 공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위에 칼뱅이 언급한 내용대로 저 역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은 순차적인 시간과 동시적인 시간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나 이 개념보다는 게임시디이론이 더 그럴 듯하지 않을까요? 시간적으로 공시적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차원적으로도 무한의 차원에 동시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프로그래머가 바로 신이다... 그럴 듯하지 않나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글에 좋은 리플주셔서 감사드리고 칼뱅의 예정설에 대해서 한번 더 공부할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부작위도 전지전능을 제한 하는 겁니다.
단순히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개념은 전지전능하고는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전지전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지전능하다?
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전지전능하지 않는 데요?
다른 말로 해보죠. 흐강님은 100m를 10초안에 뛸 포텐셜이 있어요. 그런데 뛰지 않아요. 그럼 님은 100m를 10초 안에 뛸 능력이 있는건가요?
님 스스로는 님의 포텐셜을 알아요. 확신해요. 그런데 부작위해요. 자....그럼 님은 님의 확신의 근거를 어떻게 알죠?
신은 전지전능한 걸 어떻게 알죠? 자기가 모든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를 다 알고 예정했으나(그때는 전지)그러나 지금은 다시 그 능력을 봉인하고 그때 공시적으로 모든 것을 본 기억을 지웁니다... 이때는 자기 능력의 제한이 되겠죠.
아니면 신은 원래 전지전능할 포텐셜이 있으나.. 유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나, 쓰지 않아요. 이 경우 신은 전지 한 걸까요?
이게 그리 단순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건희가 자동차를 좋아하는데 유명 명차가 경매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건희가 이번에는 사지 않습니다
이건희가 그 순간은 돈 없는 사람이 되는건가요
이건희가 지갑을 놓고 왔습니다
7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련느데 지갑이 없어요
이건희는 그 순간 부자가 아닌것이 되나요
스스로 제한하는 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반증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스스로 제환이 가능해야지 스스로 제한이 안되는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지요
절제 못하는 인간이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 아닌것처럼
전지전능은 어떤 구체적인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속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전지전능한 속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 속성을 제한 합니다. 그럼 그 속성을 가진 것일까요? 아닌 걸까요?
이런 질문이 되는 겁니다.
이건희가 부자라는 속성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날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 전부를 기부해 버립니다.
이 후에 이건희는 부자인건가요? 아니면 부자였다고 말해야 하나요?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변논리적인 문제가 되다보니 이런 논의는 피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속성의 문제를 행위의 문제로 비유했으니
그러나 신의 속성에 전능하다는 것과 스스로 제한한다는 사이에 모순은 없다고 보는것은 여전합니다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왜 전능하다는 것과 모순이 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제한한다는 것은 그 순간 전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것과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논리는 전형적인 소피스트들의 주장이거든요
여기에서 전능이라는 속성의 전제는 외부로부터의 제약에서 전능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능을 이야기할때 외부적 요인을 주로 이야기하지 자신의 의지로 인한 불능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즉 하고싶지 않아서 안하는 것을 불능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불능이지
인간은 왜 자신의 잘못을 신의 탓으로 돌릴까요
그것도 믿지 않는 신에게
잘되는 것은 신에게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건 히틀러와 그 추종 자들의 짓입니다
애초에 인간이 타락을 선택할 때 이미 신은 이 세상이 완전하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카인과 아벨처럼 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아프리카의 어린이가 죽어간다는 문제 역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의 잘못이 크지요
당장 북한만 봐도 그렇지요
한편으로는 이것이 인간과 자연의 숙명입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고통받고
그런데 신은 이 땅의 구원을 약속하지는 않지요
아프리카 어린이가 굶주리지 않으면 고통이 사라집니까
서구의 굶어죽지 않는 중산층의 아이들은 고통이 없나요
부모의 이혼과 기타등등의 이유로 인간에게 고통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신의 구원은 새로운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비참함을 가지고 신이 왜 방관하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은 무슨소용이냐
신은 결코 인간을 방치하지 않지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는데 그건 신의 의지지요
우리가 그걸 왈가왈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같이 놀라고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현실의 문제만 가지고 투닥거리다가 관념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도 같습니다.
잠깐 쉬어간다는 느낌.
오래전부터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학부때 양자론을 한참 공부할 때도 저에게 비슷한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이런 철학적인 문제는 내버려다두고 (애 키우다보면 더더욱 그렇잖아요) 현실의 문제만 바라다보니깐
무언가 빼먹은 듯도 싶었었는데..... 도에 대해서 환기시켜 주신 코지토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신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위의 제 질문에 한가지 연결해서 질문을 특히나 흐강님이나 윌마님에게 해보자면,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는 제외( 대부분의 다른 메이져 종교들의 기본적인 뼈대는 '신의 사랑'에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일, 인간의 고통, 인간의 잘못을 신에게 따져 묻지 말라고 하셨는데, 네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 아프리카에서 고통받는 아이들, 부모가 이혼해서 고통받는 아이들.... 이들에 대한 '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단 말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신과 나와의 관계에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부모)이라는 존재를
현실에 느끼고 산다는 것은 그의 자비하신 손길 또는 그가 내려다보심이 내가 살아가는 구석구석 하나하나에 다
관여하고 계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선량한 고통받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이죠?
이것도 사랑이라는 신의 속성의 태투리 안에서 해석이 가능한가요?
그렇다면, 게임 CD 우주론은 일종의 절충론인가요?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결정론도 거시적으로 포용하는 것인가요?
코지토 님께서는 게임 CD 우주론을 지지하시는 것인가요?

저는 일단은 결정론에 기울어 있습니다. 아직 공부 초기 단계라 자유 의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정론을 주장하는 치밀한 논증을 마련한 수준은 아닙니다. 아직 뭐 하나 상세히 아는 게 없으니 더 깊은 논의는 저에게 무리인 듯합니다. 나중에 코지토 님의 양립주의를 논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매트릭스를 중심 화제로 해서 자유 의지를 다룬 윗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앞으로 매트릭스 관련 후속 글 기대가 큽니다. 거듭 친절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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