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노빠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2004년에 제가 처음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적은 글이 "어느 노빠를 위한 변명" 이었어요. 그 노빠님,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의사하면서 나름 NGO활동하고 기부금 내면서... 그냥 성실한 시민으로....

그가 80년대 꿈꾼 개혁의 이미지를, 잃어버린 꿈을 그는 대선 당시 노무현에게서 봤죠. 전 그걸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가산점을 주고 싶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은 시절의 꿈을 잃어 간다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한 노빠에 대한 미시적 기록... 다시 한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물론 모든 노빠들이 저런 사람은 아닐 겁니다. MLB파크에 모인 어린 노빠들은 또 다른 족속들이겠죠. 그러나 상당수의 노빠들이 미시적으로 보면 저런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노빠를 위한 변명

어떤 민노당지지자들은 한점 망설임 없이 나를 노빠라 지칭하지만 나 스스로가 보기에 나는 노빠가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과 노빠를 감별하는 것에서 모종의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 모든게 아마도 학생때부터 우수수학능력을 변별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 교육정책의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우수한 민주노동자지지자들이다. 노빠와 자신을 잘 감별해 낼 수록 더 우수한 지지자가 되는 셈이다.



어떻든, 나는 내가 아닌 어느 다른 노빠를 위한 변명을 한번 해볼까 한다. 다시말해 노빠가 아닌 내가 노빠를 위하여 변호사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 어떤 노빠는 나의 선배다. 7살 차이가 나니 선배라기보다는 거의 아저씨뻘이다. 어떤 인연으로 인하여 그 선배와 나는 공공시설(?)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나는 어렸었고 그 선배는 당시 경찰의 수배를 받던 의대생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그 선배는 나의 멘토가 되었다. 어렵게 공부했고 힘든 시험에 합격해 의대에 진학했지만 그 선배는 민주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바쳤고 나는 진정으로 그런 그를 존경했다. 또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철학에세이, 한국현대사 등의 이념서(?)를 권했고 붉은(?) 물을 들게 만든 사람이다.


그 선배는 다행히 시대가 좋아지면서 무사히 복학해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이되고 레지던트가 되었다. 그 선배가 인턴을 할 무렵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그 선배를 만나면 그 선배는 무엇인가 무척 어색해 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섭섭했다. 얼마후 술 자리에서 그 선배의 그 어색한 감정이 무엇인지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죄의식이었다. 좀 더 사회적인 색채를 섞는다면 일종의 역사적 부채의식같은 것이었다. 운동을 청산하고 시민사회에 편입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그런 스스로에 대한 원망. 자신이 외아들이고 홀어머니의 마지막 삶의 희망이라고 하더라도, 집에 쌓인 빚이 이미 수천만원을 넘어서 자신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집안이 넘어갈 지경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자신이 이끈 후배는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는데 자신은 쁘띠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막상 그 후배는 선배가 그렇게라도 집안을 이끌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 선배가 자신에게 불편한 감정를 가지는 자체를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그런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나 보다.


술취한 채 선배는 자꾸만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나 같은 놈은 못했더라도 너는 무언가 할 거야. 나같은 놈과 너는 다르지. 다르고 말고. 우리는 뭔가 할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못했어. 할 수가 없었어....


한 일년 주기로 그 선배를 만났던 것 같다. 어떨 때에는 몇 년에 한번 보기도 했고. 그 선배는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NGO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빚도 갚고 아파트도 사면서 좀 뚱뚱해 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는 착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하지만 그는 아직도 무언가 불편하고 공허해 보였다. 술 마시면 너는 나처럼 되지마...어쩌고..하는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젠장, 나는 선배만큼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리면서 그를 부축하고...


그런 그가 모처럼 빛났던 적이 있다. 지난 대선에 노무현이 출마했을 때였다. 선배는 온통 인터넷을 뛰어다니며 도배를 했다. 선거안하겠다는 후배, 친구들 모두에게 전화하고 밥 사주면서 투표하라고 애걸복걸을 하기도 했고.


그랬다. 선배는 노무현을 보면서 희망을 본 것이다. 자신세대가 갚아야 했던 역사적 부채를 그가 갚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의 얼굴에서 모처럼 내 어린 시절의 멘토가 되었던 젊은시절의 열정과 패기를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노무현이 당선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 질건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회창당선은 막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나 역시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으니까. 노무현이 당선되고 난 뒤 그는 정말로 기뻐했다.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뻤다. 그는 80년대에 이루지 못한 일들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 이제야 부르조아혁명이 한국에서도 완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야 말로 한국사회가 근대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그와 나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처럼 되지 말라는 넋두리를 늘어 놓지 않았다. 그와 나는 행복하게 만났고 헤어졌다.


얼마전 진보누리에 386노빠들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 온 적이 있다. 대략 386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망’을 노무현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래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노무현을 따르고 종교적 광신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의 지저분한 개인적인 욕망의 투사체로 노무현을 내세웠기 때문이라면서.


난 그 인간의 마인드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스스로 D급좌파라서 그런지 스스로 A급좌파라고 믿는 그 인간의 마인드는 독해불가능이었다는 말이다. 앞에 말한 그 선배가 과연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투사해서 그토록 열심히 뛰어다니는 노빠가 되었다는 말일까? ‘개인적인 욕망’의 대상이 무엇이길래 그 욕망이 더럽기까지 한 것일까? 개인의 영달과 권력욕이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란 말인가? 자신의 세대가 이루지 못한 역사적 과업을 이루고 싶다는 욕망, 역사적 부채를 갚고 싶다는 욕망, 그것을 개인적인 욕망이라고 폄하하고 욕해도 되는 것일까?


난 물론 그 선배의 행동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선당시에도 말이다. 그는 지나치게 열중했고 오버했으며 노무현에 대한 기대는 내가 보기에 과도했다.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뛰어난 리더쉽도 보여주지 못한 평범한 정치인인 노무현에게서 그에게는 역사발전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이 순수한 것임을 알고 있다.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아직도 역사와 사회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가 좋고 존경스럽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는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홍세화씨가 수입해온 똘레랑스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사회적 관용쯤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를 난 노빠들을 욕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그 광신적인 노빠중에 정말로 욕먹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걸까? 그들중 대다수가 묵묵히 살아가면서 사회적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선배 같은 사람들 아닐까? 그들의 삶과 욕망을 ‘개인적인 욕망의 투사’라고 욕하는 그 사람은 정말로 한 점 개인적 욕망없는 사회적욕망의 결정체란 말인가? 희망을 지필 수 있는 한 현실정치인에게 역사적 소명과 사회적 희망을 투사하는 것이 그다지도 욕먹을 짓이란 말인가?


며칠전 그 선배가 전화가 와서 술 한잔하자고 한다. 바쁜 일이 있어서 그 청을 고사하면서 올해 가기전에 꼭 술한잔 마시자고 했다. 아마도 그 선배는 술 취하면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 할게다. 소시민이 되지 말라고....... 쁘띠가 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생각해본다. 그는 이 세상이 좀더 살만한 곳이 되도록 노력해 왔다고.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한 홀어머니의 아들로서 뭐 하나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는, 자랑스럽고 멋있는 인간이라고.


그러니 그가 더 이상의 부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 노빠의 개인적인 욕망을 비난하던 그도 그런 세상을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금은 너그럽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권터 그라스의 말처럼 진보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오는 것이다. 그 느림을 인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보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느림의 미학을 위해 나는 내 주변의 유일한 노빠인 그를 변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