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핫한 이슈인, 동성애 관련 각국 위키 피디아의 해당 항목 중심으로 구글링을 해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성애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인 성(sex) 과는 다른 성(gender)을 인지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같은 나이대의 일반 청소년들의 자살률에 비해 서너배나 높다는 현실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의 양지에서 세상에 관한 건강한 호기심에 둘러 쌓여 구김살 없이 마음껏 세상과 자신의 행복한 결합이라는 나르시시즘에 취해 있을 나이에, 그들은 자기가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영원한 결별이라는 선택을 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이 가진 <취향> 때문에 그 오랜 시간 동안 번민하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나? 동성애가 단순히 <각자의 지향 혹은 프라이버시> 의 문제라면 왜 그 많은 동성애자들이 내, 외적인 <커밍 아웃> - 즉 자기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세상에 고지하는 것 - 이라는 것을 하나? 성적 소수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그러한 성적 정체성을 <인정>해 달라는 것, 즉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찬성>하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 어떤 명시적, 암묵적인 차별도 받지 않도록 현실적인 보호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을 <인정>해 주고 <찬성>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명백히 사회적인 승인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동성애자들이 현 시점에서, 주류 사회에 - 즉 이성애자들에게 -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찬성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에 상응한 실제적, 구체적, 실효적 차별 금지 조처를 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2. 

 

동성애 문제를 이런 성적인 소수자들의 정체성 인정 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에, 그리고 그런 부류의 동성애자들에 관해서 이성애자들이 합리적인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반대 논거는, 현재 시점에서 없거나 희박하다. 이 말은 그렇다고 이성애자들도 성적 자기 정체성 투쟁의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적극적인 승인을 유보하도록 요구할 수 없다 혹은 요구해서는 안된다>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 동성애를 합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가?

 

    I. 동성애, 이성애를 막론하고 인간의 성적 정체성이 유전자 같은 선천적인 인자에 의해 배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가정적 환경이나 심리적인 변수, 무엇보다 사회 안에서의 구성원들과의 (상징적, 현실적) 상호 작용에 의해 삶의 전반을 거쳐 형성 되는 것이고, 

 

   II. 그로 인해 원래부터 형성된 일차적인 성 정체성 위에 또다른 성 정체성이 덧붙여 지거나 변경될 수 있는 경우, 다시 말해 배타적인 이성애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이 후천적인 변수에 의해 양성애자가 된다거나 동성애자가 될 수 있는 경우,

 

 이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 동성애자들과 양성애자들의 존재가 점점 많아 지는 것은 어떤 - 모든이 아닌- 이성애자들에게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에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를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예컨대 20세기 전반에 발표된 유명한 킨제이 보고서의 경우 실제적인 동성애 경험 + 동성과의 에로틱한 환상을 포함하여 조사 대상이 된 남성들 (교도소 재소자들)의 약 절반 정도가 동성애에 대한 지향성을 나타냈으며, 이에 근거하여 킨제이는 - 교도소라는 특수한 상황, 즉 상황적인 동성애 (situational homosexuality) 변수를 제외하고서라도 - 성인 남자의 1할 정도는 양성애 성향을 보인다고 결론 짓고 있다. 그리고 사실, 킨제이의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통계 조사들이 여러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조사들의 의하면 남성의 약 1할, 여성의 약 2할 정도가 일정 정도의 양성애 지향성을 보인다고 한다. 또한 젠더 정체성이 삶의 주기에 따라 변동한다는 생각도 아래의 2012년 미국 갤럽의 광범위한 조사 결과를 봐도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스스로 LGBT 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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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성적 정체성이 이렇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상호 작용, 그리고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풍토 자체와 개인 사이의 상징적 상호 작용을 통해 상호 주관적으로 재규정 혹은 재구성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경우에 따라 성적 소수자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성애자들 중 일부도 자신의 잠재적인 양성애적인 성향을 완전하게 발휘하는 수준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전체 인구 대비 약 3 퍼센트의 수준인 성적 소수자 비율이 남자의 경우 약 10 퍼센트, 여자의 경우 20 퍼센트 정도로 높아질 수 있다. (물론 더 많아 질 수도 있지만 이렇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사회야말로 정말이지 성적 정체성이 완전한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인식되고 또 그렇게 이해되고 다뤄지는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사회 하에서는 남녀 공히, 자신의 엑스 걸프렌드와 엑스 보이 프렌드, 혹은 현재의 <동성> 남편에게 자신의 엑스 와이프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이 오면 모노가미(monogamie)와 모노 아모리(monoamorie) 제도적인 신화 -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 벗겨지고 폴리가미(poligamie), 혹은 폴리 아모리 (poliamoire) 가 그 자리를 새롭게 대체하는 신 시대로 들어서게 될 지도 모른다. 

 

3. 

 

주류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보든, 혹은 사회 전반의 가족 정책이나 출산율 저하에 따른 노동 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하는 정책 입안자의 관점에서 보든, 동성애를 인정하고 소수자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권리를 찬성하게 될 때의 결과가 이런 식의 자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나 혹은 전통적인 가족 제도의 해체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라면, 그들이 동성애자들의 인정 투쟁에 대해 거부하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향이 나타나는지 통계적인 진실을 살펴 보기로 했다. 요컨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불식되어 있고 동성 커플을 혼인제도 안의 합법적인 형태로 인정해 주는, 이런 쪽으로 서구의 가장 개방적인 국가들 - 사실 이 국가들 조차 이런 개방적인 자유와 관용의 길로 들어선지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았다 - 에게서 동성혼인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혹은 동성혼이 제도화 되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관용에 토대를 둔 자유화 기조가 확고한 사회 풍토가 된 이후에) LGBT 의 비율이 그 사회 내에서 의미 심장하게 증가했는지를 살펴 보았다.   

 

4.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서 각국 위키 항목을 참고한 지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 내린 결론은, 통계적인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항목에 관한 가장 상세한 통계학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이후 30년간 이뤄진 조사들에서 LGBT 의 비율은 3 퍼센트 수준에서 큰 변동이 없이 대동소이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회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인정해 주는 풍토로 바뀐 이후에도 성적 소수자들의 비율이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일부 주류 이성애자들이 가질 수도 있는 정체성 변동 포비아(identity-change-phobia) - 호모 포비아도 넓은 의미로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 가 과장된 염려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5. 

 

퀴어 퍼레이드에서 벌어지는 희화화와 조롱의 난장이라든지, 커플 커밍 아웃시 남자가 새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면사포를 쓴 신부 입장으로 동성 파트너와 입장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젠더 정체성과 감수성을 노멀하게 받아들여온 - 물론 여기서 노멀하다는 것은 완전히 가치 중립적으로 쓴 것이다 - 나를 포함한 주류 이성애자들에게는 분명 모욕감을 수반한 어떤 불편함을 준다. 성적인 정체성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옷차림이나 말투, 태도 등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어떤 소중한 의미들, 상징등을 공격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일부 성소수자 단체의 이런 레토릭은 분명 비난 받을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찬반 담론의 밑바닥에는 그런 레토릭이나 공적인 정치인에 대한 무례하고 거친 태도 때문에 감정적인 비난을 통해 삭혀 버리기엔 너무나도 숭고하고 무거운 슬픔이 있다. 공동체는 개인의 삶에 내재한 그 슬픔을 함께 직시해주고 공감해 줌으로서 다시 한 번 공동체가 된다. 상처 받은 개인들 역시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다수의 구성원들의 삶을 소프트하게 규정하고 있는, 젠더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의미들, 상징들을 그 자체로 존중해 줄 때 그들의 목표가 단순히 그들만의 목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목표로 합당하게 이행해 나 갈 수 있다. 따로 또 같이 어울려 가는 건강한 사회는 이렇게 소수가 다수라는 타자들 안에서 소외 되어 머물게 내버려 두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타자 안에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타자를 자기 안으로 순치해 나가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