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글 올리기 전에 영화 감상평 한 두 가지 올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인데요. 이 영화가 참 흠미롭더군요. 영화적 재미나 예술적인 측면에서 흥미롭다기 보다 내러티브 자체에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그점을 놓치는 것이 이채롭기 까지 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지젝에 미쳐 있지 않나요? 지젝은 아마도 아바타를 보지 않았을 것 같고-지젝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화 광이 아닙니다 거의 보지 않아요-만일 봤다면 가상세계와 현재와의 접접을 뒤집어 엎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해체하고 싶어서 미쳤을 텐데요.....

아무튼 아바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매트릭스를 한번 논해야할 듯 합니다. 그래서 준비 운동으로 예전에 써 놓은 매트릭스 읽기를 포스팅 합니다.

- 좌파의 매트릭스 1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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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좌파의 시각에 실존주의 시각을 짬뽕한 후 정신분석을 살짝 가미한 매트릭스 파트 1 감상법


1. 현실이라는 환상


영화를 읽기 전에 우리가 ‘현실’ 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먼저 한번 살펴보자. 매트릭스는 현실과의 접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현실일까? 돈 없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가겠다는 딸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흔히 이렇게 말할 거다.
"넌 아직 어려서 현실을 몰라!"
이 문장에서의 현실은 다음의 의미다.

[돈이 있어야 (잘)입고 (잘)먹고 살 수 있고, 돈 없으면 죽거나 죽지는 않더라도 비참하게 살아야한다는 것. 그 기본적인 사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베이직한 원칙]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NGO에 참여하는 후배나 친구를 볼 때 우리는 의구심에 빠진다. 왜 저 녀석은 우리와 다른 현실을 사는 걸까? 저 나이에 들어서도 현실을 모르는 걸까? 그리고 그 친구를 만날 때 다음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좋은 직업(=돈많이 버는 직업) 구하고 싶은데, 좋은 차 타고 싶고. 좋은 아파트도 사고 싶고, 예쁜 와이프 얻고 싶은데. 너도 이런 욕망에 착실하게 굴복하고 있는 거 아냐? 그래서 하기 싫은 일 할 때도 있을 거고 때로는 남을 속이기도 하면서, 자본주의라는 게임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을 거잖아. 네말이 참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저 욕망, 저 욕망에는 당할 수 없는 거잖아. 너도 마찬가지잖아닐까? 너는 어쩌면 위선자 아닐까?]


NGO나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친구 역시 사실 돈 좋아하고 예쁜 여자 지나가면 쳐다보고 싶을 거다. 좋은 집 있으면 좋고 이왕이면 돈 많이 주는 직업 갖고 싶을 것이다. 때로는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별로 깨끗하지 않은 짓을 하며 융통성이라고 우기기도 할 게다. 대부부의 인간이 그러하듯 그도 그런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돈이나 그 밖의 부의 상징이 좋은 것일 수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직업선택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데 있어서, 평소 생활양식에 있어서 돈보다 우선하는 것 어떤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선택은 자본주의가 체화된 우리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된다.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다. (대부분의)우리는 굶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을 집은 갖고 있고 굶어죽을 만큼 곤궁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이 추구하는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이다. 현실에 만족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만 언제나 욕망은 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의 욕망은 그것을 부여한 주인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욕망을 부여한 주체가 누구냐고? 그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놈을 주조하고 있는 주체다. 마르크스가 토대, 사회적 존재, 혹은 생산관계라고 불렀던 존재. 


[참고 : 그러나 마르크스 후기 저작을 보면 토대≠사회적존재라는 주장이 있다 상부구조의 일부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인 것 같다 따라서 토대≒사회적 존재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참고로 막시즘에서 토대라는 용어는 생산관계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한 사회구성체가 가치를 생산하고 이를 분배하는 가운데 맺게되는 제인간관계의 체계를 막스는 생산관계라고 정의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회의 정치나 문화와 같은 기타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상부구조라 정의했다.]


워쇼스키 형제는 그 놈을 아주 독특하게 [매트릭스]라고 명명했다. 이 글은 그 매트릭스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다.



2. 싸이퍼, 자본주의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걸 알지. 이걸 입속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뇌에다가 말하는 거지.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9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후 내가 깨달은 것이 뭔지 알아? 모르는 것이 행복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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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이크를 눈앞에 둔 사이퍼의 모습


모피어스진영을 배반하면서 스미스한테 중얼거리는 사이퍼의 말이다. 철학용어(?)를 빌려 난해(?)하게 표현해 보자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겠다" 는 말이다. 이 돼지를 전문용어로 부르자면 "필론의 돼지" 쯤 되겠다. 일찍이 이문열옹께서 같은 제목의 단편을 발표하시며 필론의 돼지야말로 폭력이 횡행하는 시대에 가장 올바른 처세법이라고 설파하신 적도 있으신 철학계와 문학계에서 두루두루 유명해진 돼지다.


자본주의라는 놈은 끊임없이 우리의 뇌에 속삭인다. 니 ‘마음의 가시’는 무시해 버려. 저 아파트, 저 자동차, 저 콘도, 저 휴대폰이 있으면 넌 행복해져. 진짜야. 니가 불행한 것은 니가 수입이 적어서야.


막시즘의 용어를 빌리자면 저 속삭임은 상품의 물신화다. 상품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의미, 상품이 지니고 있는 노동력의 관계-상품안에 내재되어 있는 실존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오로지 화폐로서만, 그리고 소비자의 감각충족으로서만 존재하는 상품물신주의가 거기에 있다.


우리 대부분은 상품을 소비하면서 그것 안에 내재되어 있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키를 신으면서 동남아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약간은 상품물신화에 참여하면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이퍼는 말한다. 차라리 모르고 싶다고. 알면서 즐기기에는 마음 속의 가시가 너무 큰 모양이다. 그래서 스미스에게 부탁한다. 모든 것을 잊게 해 달라고. 상품이 주는 감각적인 쾌락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고. 물론 그가 즐기는 모든 감각적인 촉각은 같은 인간의 생체전기(노동력)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상품의 소비=행복이라는 등식을 속삭이는 자본의 외침처럼.


도대체 뭐가 행복이고 뭐가 행복이 아닌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내부에 파고들어 우리를 조정하는 환상은 집요하게 우리의 욕망을 부추길 뿐이다. 끊임없는 상품의 소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삶의 의미? 그건 니가 축적하고 소비하는 화폐의 양으로 결정되지.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화폐화 할 수 없는 짓을 해대는 너는 헛짓을 하고 있는 거야. 자본은 자신의 환상을 끊임없이 속삭인다. 부모님의 목소리로, 때로는 직장 상사의 목소리로, 때로는 설날에 만난 친지들의 목소리로.



3. 자본주의, 거대한 환상의 덩어리


일찍이 붓다께서 설파하셨지만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마야(환상, 미망)이다. 그러니 세상의 구성물 중 하나인 자본주의 역시 환상임은 자명한 것 아니냐.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 자체가 환상일진대 인간이 만든 제도는 환상 속의 또다른 환상인 셈이다. 매트릭스가 실제라는 환상 안에 다시 컴퓨터가 만들어낸 환상이듯이.

이렇게 보면 매트릭스는 불교적으로도 도교적으로도 심지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식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는 매력덩어리 물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막시즘의 관점에 기타 양념을 첨가하기로 했으니 좀 다르게 바라보자.


자본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우리의 모든 활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 으로 나누며 철저하게 ‘비생산적인 것’을 절멸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생산적인 것은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 모든 사회의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복무한다. 그러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어버린 것이고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 인간이 고상하던지, 착하던지, 혹은 고귀하던지 등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자본의 물신화에 인간이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환상에 우리가 기꺼이 굴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돈이 곧 행복이라는 속물적인 등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돈이 행복이라는 복합체의 80%의 구성성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행복은 한 20%밖에 없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동의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80%를 먼저 채운 후 나머지 20%를 채우면 된다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된다.


나름대로 먹물이라 자부하는 사람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으면서 결국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자본가가 되는 방법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자본의 룰에서 벗어나 편안한 은퇴생활을 할 수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 책의 숨은 전제 자체가 노동의 소외라는 것을 읽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가가 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 노동의 의미는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리고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과연 그 속삭임의 진리치는 T인가? 자본가가 되기 위하여, 혹은 10억을 모으기 위하여 투자하는 우리의 시간과 노동, 혹은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자본이 약속한 “유예된 행복”은 유예된 시간이 오면 지복으로 우리를 위무해 줄 수 있나?


"데블즈 애드버킷"에서 알 파치노는 악마의 아들로서 복무하는 대가가 무엇이냐고 묻는 키아누 리브스에게 답한다. 모든 감각적인 만족, 죄의식 없는 쾌락, 법정에서의 한 없는 성취감. 그러나 우리의 키아누 리브스는 이 영화에서도 빨간 약을 선택한다(자신의 머리에 탄알을 쏜다).


우리 인간이라는 족속은 어떤 경우에도 본질을 외면한 행복에서 진정한 충족감을 느낄 수 없는 종이기 때문이 아닐까? 필론의 돼지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돼지이기 때문이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문열은 결국 ‘행복’을 위해 돼지가 되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사이퍼가 택한 행복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건전지의 행복’임을 알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감상자들은 누구나 네오가 빨간약을 택할 것임을 예상한다. 이문열은 물론 파란약을 선택하라고 부추길지도 모르겠다.


감각적인 만족으로는 “마음 속의 가시”를 잠시 마취시켜 둘 수는 있어도 영구히 빼낼 수는 없다. 감각적인 만족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자본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환상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불안감(마음의 가시)을 통해 우리를 일깨운다. 자본이 주입한 기표로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다.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한 의미로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개별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주입한 삶의 의미는 실제로는 환상의 덩어리, 의미 없음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걸 느끼는 순간 로캉텡([구토]의 주인공)처럼 구토를 느낄 수도 있고 네오처럼 끝없이 잠 못들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창조하도록 규정된 존재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의미를 창조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이퍼가 먹는 즙이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보다 느브갓네살호의 꿀꿀이죽같은 밥이 더 맛있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그 밥을 통해 네오는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선택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환상을 택할 것인지 혹은 실존을 택할 것인지. 분명한 것은 실재(지젝과 라깡이 말하는 실재계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실재)라는 것이 주는 것은 언제나 비참하고 질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삶의 신비가 존재한다. 그래서 네오는 기꺼이 빨간약을 택한다. 그리고 실재와 실존을 향한 그의 모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실재도 빨간 약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 내며의 부름에 호응하는 사라에게만 삶은 환상의 베일을 거두고 자신의 신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삶이라는 것은 존재의 신비로 가득 찬 곳이다. 앨리스가 떨어진 토끼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