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 귀신이다. 소싯적부터 지금까지 빵을 좋아한다는 얘기다.
아침에는 식빵 두조각, 새벽에는 제과점 빵과 우유 한잔, 밥은 하루 한끼로 지낸지 오래다.
어쩌다 외국 가 있을 때-주로 러시아지만-도 빵만 있으면 식사문제는 거뜬히 해결된다.

 그런데 서울 근교 경기도라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제대로 된 빵가게 하나 없다. 차를 타고
시청 소재지로 나가야 겨우 괜찮은 빵가게를 만날 수 있다. 빵 메니아인 나는 전국 체인을 가진
유명상표 빵가게를 신용하지 않는다. 자기 가게에서 구워낸 따끈한 빵을 파는 단독 상호를 가진
빵가게의 빵을 그래서 주로 선호한다. 그것도 제과기술이 수준급이어야 한다.

 오랜만에 전에 자주 가던 시청소재지 빵가게-남부 프랑스의 무슨 도시 이름을 상호로 쓰는-로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빵을 두어가지 골라놓고 식빵도 구입한 뒤 계산대로 다가서는데 옆 진열
대에 요즘 많이 알려진 불루베리 잼이 놓여있는 게 눈에 띠었다.

 불루베리...말 그대로 푸른 딸기란 것인데 전통찻집 같은데 가면 불루베리 차를 취급하는 곳이
있고 변두리 호텔 커피숍에서도 불루베리 차를 판매하는 걸 보았다. 불루베리가 몸에 좋다는
소문이 나서 갑자기 불루베리 경작지가 폭증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옳지, 이 불루베리 잼을 하나 사야지. 이건 눈에 아주 좋은 거야.>
빵가게를 지키는 사람은 서른 안팎의 수수한 여성인데 아주 친절하고 살갑다. 나는 불루베리 잼
을 아주 작은 병으로 한병 구입한 뒤 가게 여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 가만 있자, 이걸 러시아 말로 뭐라드라? 스미드리..? 스미도라...? 내가 러시아에 갔을 때 이걸
자주 빵에 발라먹었는데 그 이름이 잘 떠오르질 않네요.>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성 점원이 씨익 웃으며 또렷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스마로지나>
<그래, 스마로지나 맞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
나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경기도 촌구석의 빵가게 처자가 어떻게 러시아의 푸른 딸기 이름을, 그
것도 발음도 명확하게 알고 있단 말인가? 이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여성점원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우즈벡에서 시집왔어요.>
아, 그렇구나. 우즈벡의 고려인이라면 , 더구나 한국 와서 생활한지 몇해 된 여성이라면 일반 다른 한국
여성과 외모로나 내모로나 전혀 구별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이 여성은 빵가게 주인이 아니라 빵 가게
에 점원으로 취업ㅎ해서 가게를 돕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이 우즈벡의 살가운 새댁을 상대로 내가
몇해 전 러시아에 가서 이 스마로지나를 보리빵에 아침저녁으로 발라먹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스마로지나를 내게 갈켜 준 사람은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이다. 그의 다차에서  한동안 지낼 때도 스
마로지나를 늘 먹었고 내가 다차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올 때 아나톨리는 스마로지나 한병을 구입해
서 선물로 내게 주었다.
 <눈에 좋아요> 병을 건네며 아나톨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나의 러시아 추억담을 한참 듣던 빵가게의 우즈벡 새댁이 불쑥 내게 묻는다.
<아저씨는 뭘하는 분이세요? 무슨 일을...>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손으로 글씨 쓰는 흉내를 내며
<글쟁이...>어쩌고 하며 더듬거렸다. 그녀가 이해가 안된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더니 대뜸 스마트폰을
가져다가 '글쟁이'라 한글로 쓰고 러시아말을 검색한다. 스마트폰에 구글의 번역기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글쟁이'
란 말이 러시아 말로 떠오르지 않는지 그녀가 답답한 얼굴로 나를 다시 쳐다본다.
<작가..>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을 나는 하는 수 없이 말해주었다. 그러자, 두번째 검색을 마친 그녀가
<비사체 ㄹ!> 라고 외치며 손벽을 딱 쳤다. 그녀는 신기하다는듯 더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비사체, 내가 아나톨리 옆에 있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었던 말이다.
<아저씨, 우리 가게에 자주 오세요. 그리고 한국 말도 좀 가르쳐주시고요.>
<그러지요. 대신 난 새댁에게서 러시아말을 배우고.>
우즈벡 새댁의 한국말 공부 열기는 대단했다. 빵가게를 나올 때 보니까 그녀는 작은 공책을 꺼내놓고
방금 검색에서 찾은 '작가"라는 말의 뜻을 옮겨 적고 있었다.
 불루베리, 아니 스마로지나는 러시아 산간에서 많이 생산되는 열매로  주로 시력보호에 좋은데 여름철 지방도로
를 달리다 보면 스마로지나를 산에서 채취해 온 여인들이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차량 손님을 상대로 스마로
지나를 판매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