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루 : 뭐 그런거 같아요. 미국의 경우에 백인남성과 흑인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안되지만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결혼하는 것에 대한 터부가 있는거 같다는 말이죠.

한그루 : 일본도 그래요. 일본남성과 한국여성이 연애하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뭐 이런거? '그 더러운 씨를 청결한 밭에 뿌리지 말라는거 말이죠'


오마담 : 그게 대게 인종에 대한 차별기제로 작동하는 것으로 인류의 인종 간의 우열을 가르는 대체적인 경향인거 같아요.


예전에 내가 오마담님과 나누었던 대화는 Rassenschande에 대한 것이었다. Rassenschande를 메갈리안에 대입하면 이런 것이다.


"한국 남자의 더러운 씨앗을 고결한 한국 여성이라는 밭에 뿌리지 말라"


한국의 폭악적인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반작용, 그리고 일베의 끝없는 여성비하적 태도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메갈은 그 취지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일부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너무 나가고 있다. 일베가 racism을 기반으로 한다면 메갈은 Rassenschande이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racism은 다 아시다시파 인종주의이지만 rassenschande는 인종 오염이라는 뜻으로 나찌의 인종차별 중에 가장 막장의 행태를 취하는 인종 차별이다.


Rassenschande : Nazi term for sexual relations with a non-Aryan (나찌 용어로 아리안족이 비아리안족과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



Rassenschande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사진 하나를 보여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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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중이 나찌식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있다. 폭악적인 나찌 체제 하에서 그는 왜 경례를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었을까? 


 "나치 경례를 하지 않은 남자"(Guy Who Refused To Give A Nazi Salute), "팔짱 낀 남자"(The Man Behind The Crossed Arms)라는 이름으로 아주 유명한 이 사진 속의 남자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August Landmesser).

그는 유대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 한달이 지나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었다. 뉘른베르크 법은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법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약칭 나치당 또는 NSDAP) 정권 하에서 제정된 2개의 법률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Gesetz zum Schutze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과 《국가시민법》(독일어: Reichsbürgergesetz)의 총칭이다.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한 법률로 악명이 높다"


즉, 모든 독일인들은 다른 민족, 특히 유대인과 혼인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는데 아우구스트 란트메서는 유대인인 자신의 부인 그리고 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존중하는 의미로 경례를 하는 대신 비웃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트 란트메서는 아우구스트 프란츠 란트메서와 빌헬미나 막달레네 슈미트포트 사이에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1931년 란트메서는 일자리를 구하려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5년 이르마 에클러(Irma Eckler)라는 유대인 여성과 사귀게 되어 당에서 제명당하였다. 란트메서와 에클러는 함부르크에서 결혼했고, 둘이 결혼하고 한 달 뒤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어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1935년 10월 29일 장녀 잉그리드가 태어났다.

유명한 사진이 촬영된지 1년 뒤인 1937년 란트메서는 아내와 함께 덴마크로 도피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37년 7월 인종오염죄로 고발당했다. 란트메서는 아내가 순혈 유대인인 줄 자신도, 아내 스스로도 몰랐다고 항변했고, 1938년 5월 27일 유대인 여자와 부부생활을 계속할 경우 감옥에 갈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란트메서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고, 1938년 7월 15일 다시 체포되어 니더작센의 엠슬란트라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란트메서가 수용소에 끌려간 뒤 임신 중이었던 에클러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풀스뷔텔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감옥에서 둘째딸 이렌느를 낳았다. 란트메서 자매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가 그 뒤에 할머니가 데리고 갔다. 1941년 이렌느는 다른 가족에게 입양되었고, 잉그리드 역시 1953년에 할머니가 죽자 그 가족이 데리고 깄다. 에클러는 아이들을 빼앗긴 뒤 이곳저곳 강제수용소를 오가다가 1942년 2월경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에서 다른 사람 14,000여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한편 란트메서는 1941년 1월 19일 감옥에서 출소하여, 한동안 퓌스트(Püst) 화물운송회사의 감독으로 일했다. 그러다 1944년 2월 죄수부대인 제999아프리카 경보병사단에 징병되어 전쟁터에 끌려갔고, 1944년 10월 17일 크로아티아에서 작전 중 사망하였다. 란트메서와 에클러는 1949년 법률적으로 사망이 선고되었다. 함부르크 시의회는 1951년 여름 아우구스트 란트메서와 이르마 에클러의 결혼을 소급 적용하였고, 그해 가을 큰딸 잉그리드는 "란트메서"로 성을 갈았다. 작은딸 이렌느는 그 뒤로도 "에클러" 성을 사용했다.
(출처는 여기를 클릭)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하여 인종오염죄목을 뒤짚어 쓰고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우구스트. 황우석 사태 때 유명해진 헬싱키 인권보호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모든 인종청소를 금지하는 법률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인종오염죄가 만들어진 그 장소인 뉘렌베르그와 같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면서 Rassenschande적 행위를 하는 일부 메갈리안에게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동정.

무엇이 그녀들을 그렇게 극한 상황까지 내몰았을까? 그녀들은 그래서 행복한걸까?


일베의 인종주의, 메갈의 인종오염... 


그 다음에 우리 사회가 막장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은 무엇일까?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