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TV를 철거한 지도 십여년이 되어가고, 종이 신문 구독을 끊은 지는 20년이 훨씬 넘는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문재인의 TV토론을 보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해당 영상을 찾아볼 정성은 더욱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외계어' 수준의 말주변에 대해서는 그래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등장하는 발췌본(?) 등을 통해서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언어 해석기가 등장했을 때도 우스개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냥, 말을 참 못하나 보다... 이 정도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특별히 원고 없이 얘기할 때 정확하게 주어+술어 구조를 갖추어 말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좀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박근혜의 모든 것에 왜곡의 색칠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자세히 알아볼만한 애정이나 관심은 없었다.

어제 정규재TV와 했다는 인터뷰 동영상을 끝까지 봤다. 봤다기보다는 들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처음 10분 가량은 동영상을 말 그대로 '시청'했지만 이후에는 이어폰을 꽂고 소리만 들었기 때문이다.

내 느낌으로는 그동안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씹어댔던 그 어버버 수준의 말솜씨는 아니었다.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 때 프롬프터를 동원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저 정도 말솜씨라면 사안에 대한 이해능력이나 지적 수준 등이 평균 이하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준을 현역 정치인 전반으로 확대해도 그렇다.

문재인이 지난번 JTBC에 나와 손석희의 질문을 이해 못하고 버벅버벅 버버버버벅댔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지적 능력 등이 앞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지난번 대선에서 투표를 포기했지만, 만약 투표장에 나갔다면 차라리 박근혜를 찍었을 거라고 페이스북을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공언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 인터뷰를 끝까지 들으면서 나의 그 발언에 안도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됐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청산유수라거나 유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의 말이 중요하다는 건 연설학원에서 배우는 꼬맹이들 수준의 그런 발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용과 맥락, 이게 핵심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거라는 게 내 소신이지만, 그 말이라는 게 결코 유창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는 '박근혜 대통령은 워크홀릭 수준'이라는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의 증언도 있었다. 대통령이 워크홀릭이라는 게 대단한 이슈일 수는 없지만, 박 대통령의 경우는 다르다.

근무를 관저에서 하느니, 업무 시간에 성형 시술을 했느니, 프로포폴을 맞았느니, 굿을 했느니, TV드라마 광이라느니 하는,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정황 증거라는 것에 박근혜 대통령의 게으름과 무능, 업무 소홀 등이 빠지지 않고 양념처럼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내 느낌으로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정호성 비서관의 증언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하루에도 수없이 올라오는 보고서들, 100페이지짜리 보고서도 박 대통령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밑줄 쳐가며 읽었다는 말이 그냥 꾸며서 할 수 있는 얘기 같지는 않다.

약간 엉뚱한 방향에서의 증언이 기억난다. 조선일보 어떤 데스크가 2년 전이던가 칼럼 형식으로 썼던 글이다.

청와대가 반드시 챙겨야 할 중요인사의 장례식에 근조화환을 보내야 하는데 이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간단히 말해서 근조화환 보내는 명단조차 비서실에 일임하지 않고 박 대통령이 직접 챙긴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보니 보내야 할 화환을 제때 보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칼럼의 진짜 주장은 '박 대통령이 만기친람 식으로 모든 걸 챙기다 보니 공기업 등의 인사결재조차 미뤄져서 문제'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칼럼의 진짜 의도를 '아랫 사람들 먹을 것도 좀 남겨줘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울러, 언론 등의 몫도 챙겨달라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이 워크홀릭이자 만기친람식 업무를 했다는 증언(악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것까지 포함해서)과, 대통령이 업무는 대충대충 하고 성형수술이나 하고 프로포폴 맞고 엉뚱한 짓을 했으며 굿판을 치르고 했다는 얘기는 상호 모순된다. 박근혜를 비판하는 주장들의 논거가 상호 배척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이는 주장의 진실성을 의심해야 하는 전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을 꼬집는 '적자생존'이라는 말도 그렇다. 장관이나 비서관 회의에서 토론 없이 박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적기만 한다는 건데, 물론 이 스타일 자체는 문제지만 적어도 박 대통령이 이른바 똘팍 수준의 지능이나 지식을 갖고 있어서는 생길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대면보고나 토론 없이 서면으로 이를 대체한 것은 심각한 컨센서스 부재를 낳은 핵심 원인이었다고 본다. 이런 빈틈을 타고 갖가지 의혹과 이른바 국정 농단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웃기는 일들이 발생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비판과 단죄는 최소한의 균형 감각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지금 탄핵의 근거라고 얘기되는 것 가운데 실제 범죄 행위로 이어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내 기대감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 기대감에 비해서 실상은 그래도 꽤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박근혜에 대한 기대감 수준이 나보다 100만배 정도 더 낮은 분들이 박근혜의 그나마 괜찮은 모습을 보면서 왜 여전히 저렇게 분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기대감의 종류 아니겠나. 박근혜의 실력이 무언가 하는 기대감보다, 저게 언제 물러나서 권좌를 우리 달님에게 넘겨주나 하는 기대감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내려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9/20170119025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