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한가하고 여유로운 추석 휴일이어서 가볍게 고령에 있는 김종직 5대손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룬 개실마을로 떠났습니다.

기왕 가는 길에 고령지역이 가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 박물관을 먼저 찾았습니다.

박물관은 앞과 뒤는 가야 고분군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요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는 의외로 낮은 산이더군요

접근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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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박물관의 모습속에는 나름 알찬 소장물이 있었고 마침 한성백제 박물관의 한성 백제 기획전이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가야 역사는 사실 기록이나 유물이 그다지 많지도 않고 관심도 적습니다.

그런데 주로 한반도 남쪽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 덕유산과 지리산 골짜기사이에 자리잡은 가야국이 의외로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가까운 신라보다 백제와 더욱 긴밀하고 가까운 교류를 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신라의 지배 세력이 북방에서 이주한 민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보면 어떤 경로로든 한반도 남쪽에 구석기 후반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모여살았고 그들은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이루면서 주변 부족들과 알고 지냈고 점점 큰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죠

그래서 중국에 알려지기를 마한 진한 변한 이렇게 삼한으로 알려졌고 그 삼한 내에는 아주 작은 나라들이 있었죠

마한은 50개에 가까운 나라였고 가야도 보니까 나라를 칭한 집단들이 여러개였습니다.


각각 중세 영주처럼 독립된 집단을 이루면서도 지리적 언어적등의 동질성을 중심으로 뭉쳐서 협력하고 갈등과 경쟁을 하면서 존속을 하다가 온조가 내려와 한성백제를 세우면서 남쪽 마한을 흡수하였고 신라는 북쪽계통의 민족들이 내려와서 통일을 하고 이에 맞서 가야국들도 연맹체를 구성하고 국가로서 틀을 만들어 갔다고 볼 수 있죠

그중 세력이 가장 강한 가야가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는 토기출토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의 세력권을 하동 여수 순천 고흥까지 포함한 상당히 광대한 영역으로 표시를 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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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야와 백제의 관모습이 상당히 닮았고 심지어 형제국가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실제로 백제 성왕때 관산성 싸움에서는 왜와 가야 벡제 연합군이 거창 무주 영동 금산을 거쳐서 옥천으로 올라오다가 백제 성왕이 밤중에 성급하게 관산성 함락을 축하려고 이동하다  신라와 내통한 지방호족들의 첩보로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그후 10년이 안되어 가야가 망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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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금동관모자등이 백제 양식과 아주 유사하죠

실제 출토한 유물도 있고요

가야지역은 신라와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는데도 왜 백제와 더 친하게 지냈는지 그 점이 궁금합니다.

가까운 신라가 더 위협적이었는지 아니면 백제가 우호적으로 대했는지 또는 어떤 동질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연구 주제가 될것 같습니다.


고분군으로 올라가면 가야 고분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었는데요 

상당한 규모의 고분은 잘 보존이 되어서 발굴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순장을 했더군요

그중 눈에 띄는 순장의 모습은 남녀를 머리가 반대로 가게하여 포개놓은 것과 어린 여아와 아버지의 모습을 포개어 순장한 것 또 하나는 10대 여성의 순장등이었습니다.

죽어서도 살아서와 똑같이 시중을 받고 싶었던 인간의 욕심이 생목숨을 이별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인간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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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령지역의 조선시대 호구단자를 보았는데 의아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호구단자는 조선시대 호구조사를 위해 백성들이 자기 주소와 친가 외가 4대조를 적어 내면 사실확인을 거쳐서 관아에서 호적대장에 올리는 것인데 전시된 두장의 호구단자를 보면 이 사람들의 직업은 역리였습니다.

오늘날의 철도청 직원 같은 역참에서 근무하는 아전내지 역졸이었다고 보이는데요

아내나 장인들도 역리여서 대부분 같은 직업이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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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들의 증조부등이 통정대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통정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정3품 당상관에게 내리는 품계였는데요

일개 역리가 통정대부의 품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죠

아전이나 역리나 잘해야 중인계층인데요

정 3품 당상관 통정대부의 손자라니오


아마 과거 급제하여 실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 공명첩을 사서 얻은 벼슬로 보입니다.

그런데 일개 역리들 그것도 두집안이나 다 통정대부 인것을 보면 공명첩이 얼마나 남발이 되었는지 알 수 있고 생각보다 가격이 저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지금도 시골쪽 가면 묘비에 통정대부나 통훈대부의 벼슬이 가장 많이 적혀 있습니다.

대부분 공명첩을 산 신분인데요

아마도 조정에서 기왕 인심쓴것 당상관 소위 품계를 주어야 사람들이 살 것 같으니 그런듯 합니다.


증조부가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인데 손자는 말단 역졸이나 역리를 하고 있다니 이거 좀 웃음이 나오는 일이죠


나오는 길에 박물관 옆 언덕에 꽃무릇이 조금 피어서 사진기로 담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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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5대손이 와서 정착한 개실마을은 생각보다 볼 것이 없었고 건물도 경북도 민속자료 정도로 급이 낮고 대부분 기와집이 관광 목적으로 군청에서 지원하여 새로지은 집들이었습니다.

특별한 풍광도 없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