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대한민국 헌법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3.1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운동이다. 이 3.1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자는 친일세력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대한민국의 국호를 사용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대한민국이 기미년 독립운동으로 건립되었고 제헌헌법으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이 되는 것이다.


제헌헌법 제정 당시에 수구기득권, 친일세력들이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친일파들의 아버지"인 이승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1948년으로 하자는 것은 선조들의 혁혁한 독립투쟁을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우고자 하는 속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반민족적인 친일부역의 행위들을 대한민국 역사 이전의 행위로 치부하려는 것이다.


이승만이 누구인가. 이승만은 조선왕조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5대 손이다. 그러나 집안에서 과거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하는 등, 사실상 종친으로써 대우도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가문 출신이다. 이승만이 20세가 되기 전에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이승만은 신식교육을 받는다. 이승만은 일제가 실시한 단발령에도 찬성하여 머리를 자르고 생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친미파인 서재필의 수제자가 된다. 즉, 미국은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도 미국 개신교로 개종한다.


이승만이 독립협회 거두 박영효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 6년간 옥고를 치루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많은 민족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을 부탁했을 때에도 이승만은 기독교 세례를 받고 선교운동에 치중했다. 거듭된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에게 미국의 친구들에게 부턱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청원라는 요구에, 이승만은 친일 성향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좋은 친구"인 미국이 이같은 청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승만의 청원은 보기좋게 거절 당한다.


1907년 독립운동가들이 헤이그에 특사로 이승만이 가기를 요구했을 때. "미국 명문대에서 학위를 받아야 국내 활동이 편해진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또, 장인환 등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것 등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미국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적인 외교 활동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할 경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가 부족한 것이었다.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미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겠다는 선교가의 마음자세였지, 독립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었다. 실제, 그는 반일운동이나 혁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일본 총독부가 오해하면 어쩌나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연구반을 만들고, 반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학과 기독교 정신이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러나,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조치가 있자, 그 역시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체포될 뻔 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협조를 얻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망명 갈 때의 신분은 세계감리교 대회 조선 대표였다. 독립운동가의 자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생복음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조선 독립이 아니라, 교회 독립이었다. 이렇게 다시 떠난 그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연줄을 맺게 된다.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여러 단체의 수장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번번히 이승만의 방해로 통합에 실패한다. 그 결과 상해 임시정부는 추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만다.


결국, 각종 독립운동 단체는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정하고, 이름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따르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고 분열이 된다. 당시 신채호, 안창호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의 결사항쟁 및 독립군 육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조와 기독교 정신의 확장을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한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 외교독립론 주장으로 임시정부는 분열되고 만다.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론과 이승만을 버리고 다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개조논의 까지 나왔고, 거기에 이승만의 몇 가지 비리가 더해져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 이후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저지른 패악들은 일일히 열거하기 조차 힘이 든다. 대표적인 예가 4.19 혁명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이승만을 국부라고 칭하는 세력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하고 그들만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정, 재, 관계, 예술계, 학계 등 모든 국가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며, 국민대통합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다. 이들이 기득권을 누리는 방법은 남북대치를 조장하여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지역 간, 세대 간 대결을 부추겨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애국(愛國)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랑스러운 3.1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훼손과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폄하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과 자신들이 조상들이 저지른 반민족적 행위들을 아무런 반성없이 역사에서 지우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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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야당 건설을 통하여 김대중의 민주평화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정치세력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