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단 한번의 간곡한 청을 나는 들어주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90년대 초 시인 김남주가 내가 사는 대치동의 어느 카페에서 나를 기다렸다. 6월항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일자를 기억할 수 없다.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00회의란 단체의

명색이 부회장이고 김시인은 사무국장이었는데 나는 항쟁도 끝나고 더 이상 단체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를 그만둘 예정이었다.

"좀 더 같이 일합시다."

김시인은 그 특유의 짤막한 어법으로 말했다. 그는 나와 절친사이가 아닌데도 내가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단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냥 차나 마셔. 건강은 괜찮은가?"

"아직 괜찮아요." 내가 거취에 대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그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연했다. 출옥한지

얼마 안 되어 이제 겨우 사회생활?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는 그를 옆에서 도와주지 못한 게 참 안 되었지만

나는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오래 전 광주에 들른 김에 처음으로 망월동에 가서 김남주의 묘소에서 반시간 가량 머물다가 왔다.

그때의 마음의 빚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내가 그 단체를 그만둔 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병마로

쓰러졌다. 나는 그 병이 오랜 감옥생활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대의 희생자이다. 그의 격렬하고 직설적인

시를 보면 그는 시인 보다 혁명가 이미지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출옥 이후 그는 사람이 바뀌었다.

내 판단이다. 그는 오래 그를 기다리던 여성과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다. 사무실에서 자주 아들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혁명가 아닌 , 보통의 시인으로 , 좀 더 평탄하게 살기를 원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김규항의 칼럼 타이틀처럼 '혁명은 안단테로'와 같은 논조로 서정시나 혹은 사회비판의 시를 쓰더라도 그는

일급의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거칠고 사나운 그의 혁명시에서도 뛰어난 언어감각은 감지된다.


 그러나 감옥의 저주는 그의 희망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처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이름을 팔고

그를 내세워 자기네 기치를 펄럭이던 사랆들이 그의 처자에게 무관심했고 지금도 여전할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문학은 상업주의로 엄청나게 변해버렸고 요즘은 김시인 이름을 거론하는 이도 보기 힘들다. 그는 철저하게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