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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악장은 쉽게 찾아 이어 들을 수 있습니다.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는 누구일까?  이 명제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갑자기 친해진 한 인물 때문이다. 요요마, 린 하렐, 게리 호프만 등 이
름들이 떠오르지만 년륜이나 비중으로 볼 때 선 듯 수긍이 가지 않는다.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레오나드 로스(1918~1984)야 말로 현대 미국 첼로의 얼굴로 세우기
에 손색없는 이름이 아닐까. 그는 연주기량도 뛰어나지만 첼리스트로서 거의 모든 역
할을 거치고 그것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독주자로, 오케스트라 주요 멤버로, 현악 삼중
주단의 중심으로 그리고 스승으로.
 
 레오나드 로스의 연주기량을 확인하는 건 3분이면 족했다. 쇼팽의 하나 뿐인 첼로
소나타의 <라르고>, 우연히 이것을 맨 처음 들었는데 지금껏 내가 최상으로 치던 나탈
리아 구트만의 연주에 비해 약간 색채는 엷었으나 선이 뚜렷하고 호흡에
여유가 있는, 매우 품격 높은 연주였다.  
레오나드 로스가 내게 더 강한 인상을 심어준 건 글렌 굴드와 손을 맟춘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연주다. 고전 중의 고전이 된 이 소나타는 언제 다시 들어도 늘 새롭고 감
동적이다. 성격상 전혀 걸맞지 않는 이 두 사람의 연주광경은 음악 뿐 아니라 회화적 즐
거움도 선사한다. 글렌 굴드는 녹음실 연주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누구와 듀엣으로 연주한 것은 메뉴힌과 바흐 곡, 베토벤 곡 등을 작은 무대
에서 연주한 걸 봤던 기억 뿐인데 전력투구 연주란 인상은 받지 못했다.
레오나드와 글렌 굴드, 한쪽은 성급하고 고집불통이며 한쪽은 느긋한 인상인데 창과 방
패라는 비유가 어울린다. 두 사람이 이 첼로 곡의 명품을 어떻게 연주할까?

 굴드는 한 손이 잠시 건반을 떠나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결코 손을 쉬게 하지 않고
손바닥을 활짝 펴서 허공에 부채살 같은 무늬를 계속 그려낸다. 녹음실에서 혼자 연주할
때 버릇인 것 같은데 이 손동작은 자신에게 혹은 첼로의 로스를 향한 일종의 지휘동작으
로 읽힌다. 로스는 굴드의 요란한 동작을 힐긋 봤지만 표정에 아무런 반응이 없고 자기
길만 내달린다. 이 장면이 약간 코믹한 느낌을 준다. 음악이 느리게 진행되는 3악장 아다
지오 칸타빌레에서 굴드가 뒷자리의 로스를 흘깃 돌아보는 모습, 동반자의 건재를 확인하
는듯한 그 천진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협연자에 대한 친애감, 신뢰의 표시일까.
두 사람의 대화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되고 끝났다.

 나는 3번 소나타를  수없이 들었지만 성격이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의 연주만큼
 만족감을 느낀 기억이 없다. 그들은 이 곡에 숨결을 불어넣고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음악 스스로 걸어나가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굴드의 천재성을 감싸안은 로스의 부드러운 
포용력이 큰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된다. 협연한  굴드에 대해 로스는 말한다. "내가 
들었던 피아노 사운드 중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사운드., 그는 비상한 테크닉과 기억력의
소유자이며  스코어를 한번 보고 즉시 뛰어드는 직관력을 가진 행운아."  

 독주 첼리스트로 슈만, 드볼작, 엘가 등의 협주곡에서 레오나드 로스는 거의 이론이
없는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이력에서 초기 오케스트라 시절과 이후 절정기를 장식
한 실내악 멤버로서 활약은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부르노 월터가 이끄는 뉴욕 필에서
수석 첼리스트로 말러의 거의 모든 교향곡들을 미국에서 초연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로
스를 매우 소중한 친구로 여기던 이 전설적 지휘자로부터 로스는 "음악에 헌신하는 진
정한 정신과 자세"를 배웠다고 뒷날 술회했다. 아이작 스턴, 유진 이스토민과 형성한
트리오의 활약은 오랜기간 그의 절정기를 장식했다. 최상급의 조화라는 평가를 얻은 이
그룹은 슈베르트 <3중주곡 No.1 op.99>, 1966년도 녹음된 베토벤의 <Archduke> 등 수많
은 유산을 남겨놓았다. 

 레오나드 로스는 러시아계 유대혈통이지만 순수 미국태생이란 점에서 미국인들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진 것 같다. 그의 가계가 첼로 계보를 잇는 점은 특이하다. 사촌
프랭크 밀러는 먼저 첼로에 입문했으나 로스의 뛰어난 자질을 발견하고 경쟁자 아닌 절
대적 지원자가 되었다. 지금 주가를 높이는 게리 호프만은 조카가 된다. 호프만은 로스
의 1682년산 "아마티"를 물려받았는데 이 젊은 연주가 연주를 들어보면 그는 악기 뿐 아
니라 로스의 품성과 아름다운 발성, 성실한 자세 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느낀다.

 로스의 제자들 가운데 줄리아드의 요요 마, 정명화, 커티스의 린 하렐 등이 눈에 띤다.
번쩍이는 스타 지향 보다 성실한 음악도, 연주가를 지향했던 레오나드 로스. 1984년
열린 추모 연주회에는 아이작 스턴, 요요 마, 린 하렐, 펄만 등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은
슈베르트 <현악5중주곡(String Quintet. op.163)을 연주했는데 곡 탓인지 분위기가 유난히 
무겁고 침울해 보였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서 그들이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한 스승
이자 동료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