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이란 악기는 요술지팡이와 같다. 비정하고 오만한 고가의 보석 같은 느낌을 주는가 하면 어느 땐 갖고 놀기 좋은 작은 장난감 같은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이 악기가 들려주는 음악 역시 그렇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같은 대곡을 너끈히 끌고
나가는 위력을 보이는가 하면 바치니의 <고블린의 춤> 같은 곡에서는 아기자기한 유희의 극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가는 위력을 보이는가
 


나는 한동안 바이올린 소리를 듣지 않고 되도록 멀리 하려고 애썼다. 날카로운 금속성 음향이 청각에 거슬렸던 것이다. 소프라노 노래도 역시 같은 이유로 피했다. 당시 주로 듣던 오디오 기기의 품질이 열악해서 그런 증상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다시 바이올린과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났다.

2005년 내가 모스크바 변두리 뚤스카야에서 한동안 머물던 시기이다.
"저는 바딤 레핀(Vadim Repin-1971~)을 좋아해요. 그를 닮고 싶어요." 십년째 그 도시에서
바이올린 공부를 해온 잘 생긴 한국 청년은 내가 묻기 전에 내게 말했다. 그는 내게 아파트를 잠시 빌려주고 여름휴가기간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으로 잠시 들어본 그의 연주는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방에는 피아노와 작은 컴포넌트가 있고 수백장의 CD 음반들이 피아노 덮게 위에 쌓여 있었다. 전부 바이올린 곡들로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등 지난 시대의 명연자들과 바딤 레핀 등 새 얼굴들 음반들이 고루 섞여 있었다. 초기 한동안 사람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던 나는 뜻하지 않게 종일토록 바이올린 연주 감상에 매달렸다. 자연히 출중한 기량을 보인 바딤 레핀의 연주력에 이끌렸다. 그는 피지컬, 절제된 감수성, 열정 등 삼박자를 갗춘 완벽한 연주자로 지금은 떠오르는 해가 아니고 중천에서 휘황한 빛을 발하는 대스타가 되어있다.
 그날 이후 여기저기서 바딤 레핀의 연주를 찾아 듣다가 갑자기 막심 뱅게로프(1974~) 가 또 좋아졌다. 그 이유는 '바이올린의 쇼팽'이라는 폴랜드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핸릭 비에냐프스키(Henryk Wienawski-1835~1880), 그의 작품들 때문이다. 사실은 뱅게로프가 좋아서 그가 주특기를 발휘하는 비에냐프스키 곡들 듣게 되었는지 그 곡이 좋아 뱅게로프가 덩달아 좋아졌는지 확실치 않다. 이런 혼란에는 이유가 있다. 뱅게로프는 비에냐프스키가 자기의 정신적 스승(요즘 흔히 말하는 맨토)이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 비에냐프스키의 작품들,
특히 <Polonaise Brilliante> 같은 곡을 연주할 때만큼 뱅게로프가 매력있게 보이고 연주자 본인도 신바람을 내는 경우가 다시 없기 때문이다.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인다.

 비에냐프스키 작품은 감상 가이드 북 같은데서 겨우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정도지만 바이올린이란 악기 입장에서 보면 어느 곡 못지 않은 대단한 명품이라고 할만하다. 일급의 연주자들이 다투어 협주곡2번을 비롯 그의 다른 곡들을 연주, 녹음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후기낭만에 해당되는 그의 음악에 심각한 주제랄 것은 없다. 다만 아름다운 시정과 멋진 유희가 그 음악에 넘쳐 흐른다.

 그의 음악은 폴랜드 민속 춤과 노래가 어울어진 <MAZOWSZE> 같은 음반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활기찬 율동과 서정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비에냐프스키는 파가니니가 그렇듯 바이올린 장인이란 특기를 살려 이른바 아크로바틱한 변화무쌍한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다. 발랄한 춤과 같은 빠른 템포의 교차 이후 뒤따르는 부드러운 서정은 그 분위기가 독특하고 고귀한 품성을 뽐낸다. 뱅게로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up and down 의 돌발변수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뱅게로프에겐 이런 변화를 잘 구사하여 청중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출한 능력이
있다. 비에냐프스키 작품을 연주할 때 특히 자주 나타나는 그의 변화무쌍한 표정연기도 청중을 끌어당기는 무기가 된다. 나이 들수록 그의 얼굴은 피에로, 혹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변해가는데 이런 모습은 비에냐프스키 음악에 쏟아내는 그의 열정의 징표로 그 음악과도
썩 잘 어울린다.
 
 비에냐프스키는 비록 폴랜드 태생이나 그의 음악적 귀향지는 모스크바란 도시이다. 그의 또 하나의 특이한 걸작에 해당하는 <Souvenir de Moscow>라는 작품을 들어보면 그가 대부분의 음악활동기를 보낸 이 도시에 얼마니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뱅게로프와 바딤 레핀은 공교롭게 노보시비르스크 동향 출신이며 초기 스승도 같은 인물이다. 뱅게로프는 어릴 때 아버지가 오보에 연주자로 있는 그곳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가끔 갔는데 아버지가 맨 뒷 구석에 앉아 보이지 않아서 자기는 맨 앞줄에 앉을 수 있는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를 바이올린 곁으로 다시 이끌어주었고 바딤 레핀을 닮은 연주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 잘 생긴 음악도는 지금 어디쯤에 서있을까?

*음악은 전에 올린 것을.누락되어 복귀시키고 원고는 새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