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는 효율성(efficiency)에 대해 '일을 옳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효과성(effectiveness)에 대해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효율성과 효과성은 모두 경영학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저 개념을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그렇게 쓰는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일 것이고 가장 일반적인 용도는 저런 것으로 알고 있다.

효율성과 효과성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비누 공장에서 포장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시스템의 오류로 가끔 비누곽에 비누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텅 빈 상태로 출고되는 경우가 생겼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0.001%의 확률이라 해도 그러한 오류가 발생시킬 수 있는 부작용은 심각하다. 그래서 경영진은 이 오류를 잡아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외부 컨설팅 업체까지 동원되어 첨단 장비를 동원한 '빈 곽 색출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여기에 몇 십만 달러의 비용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스템 구축을 앞두고 현장을 둘러보던 경영진은 포장 라인에서 선풍기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답변은 이랬다.

"선풍기 바람을 라인에 보냈을 때 날라가는 빈 곽을 걸러내고 있다."

여기에 든 비용은 선풍기 값 단 몇 십 달러에 불과했다. 외부 컨설턴트를 동원해서 최단 기간에 최소의 비용으로 거창한 빈 곽 색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효율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일을 '옳게'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효과성과는 무관한 얘기다. 효과성은 바로 저렇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빈 비누곽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빈 비누곽 얘기는 워낙 유명해서 효율성과 효과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이용해봤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싶은 것인지는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한마디로 생산력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효율성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 얼마나 허접한 개소리인지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생산력을 설명하는 데 효율성이라는 개념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생산력=효율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황당 그 자체다.

사실은 효율성과 효과성을 통합한다 해도 생산력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효율성과 효과성은 경영학의 개념이고 계량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생산력을 계량할 수 있는 단위나 방식은 없는 것으로 안다.

흔히 하는 말로 20세기의 중산층은 중세 시대의 귀족이나 왕보다도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린다고 한다. 관념론에 빠진 허접 좌파들은 말도 안된다고 할지 모르나 이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이렇게 엄청난 생활 수준의 차이를 낳은 것이 바로 생산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활 수준의 차이를 낳은 그 생산력의 차이를 계량할 수 있는 단위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유일하게 가능한 단위가 노동 생산성일 것이다. 가령 밥 한 끼(이것 역시 필요 칼로리 등 적정 수준을 미리 정해야 할 것이다)를 해결하기 위해서 투입해야 하는 그 사회의 평균 노동시간을 시대별로 측정할 수 있다면 아마 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것을 계량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로 학계에서 그런 시도가 있었는지는 공부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다만, 노동 생산성을 측정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다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넷이나 컴퓨터의 발전을 노동 생산성이란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또 하나, 사회 전체의 지식의 총량이란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것도 역시 불완전하다. 사실 이런저런 측정 기준을 만들어볼 수 있지만 생산력은 그 모든 것의 총합을 훨씬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생산력의 발전이란 것은 효율성이나 효과성 등 경영학의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다. 경영학의 개념으로 측정할 수 있는 차원의 변화라면 생산력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보기 어렵다. 이를 잘 설명한 것이 슘페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우편 마차를 아무리 많이 연결해도 기차가 될 수는 없다."

양적 변화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질적 변화가 생산력 발전의 핵심이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발언인 것 같다.

기존 택시 사업의 경영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합리화한다 해도 우버 사업의 그 혁신성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아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만한 기준 자체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생산력의 발전이란 기본적으로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아시겠지만 이 포스팅은 패션(passion)의 주장에 대한 답변이다. 지난 주 월요일에 돌아온다고 그래서 기다렸는데 그 뒤로 다시 1주일이 더 지나도 답변이 없기에 아예 그냥 내가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올리는 글이다.

견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나 역시 경제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다.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다. 하지만 기본적인 개념조차 이해 못하면서 상대방을 가르치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앉아 토론을 하려 드는 싸가지는 봐주기 어렵다. 생산력을 얘기했더니 처음엔 효율성의 개념을 얘기하고 나중에는 생산성을 얘기한다. 왜 내가 말하는 것과 다른 개념을 갖고 와 토론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패션은 내 포스팅에 언급하면서 무슨 책을 읽지 않았느냐고, 자기 같으면 책을 쓰기 전에 그 책부터 읽었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당장 읽겠다는 얘기를 계속 했다.

토론을 하면서 어떤 자료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아닌 말로 이 세상에 관계 없는 게 어디 있나. 지역차별 문제를 논하면서 소크라테스나 공자, 성경을 먼저 읽고 오라고 해도 말이 안되는 것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아예 토론을 깽판 놓자는 얘기밖에 안된다. 근거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패션은 그 전자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그 근거란 것을 설명한 적이 없다. 그냥 가장 앞선 내용이니까, 저자가 당신보다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따위 소리를 근거랍시고 늘어놓았다.

그래도 나는 상대의 선의를 일단 믿고 읽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자책이 열리질 않네? 그래서 꼭 읽어야 하느냐고, 지역차별에 관한 웬만한 담론은 아크로나 다른 사이트에서 숱하게 소개됐으니 책을 읽고 오라는 것보다 그냥 이 주제를 갖고 얘기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패션이 뭐랬나?

[ 마치 책을 읽으라 강요한 듯 내 글이 읽힌 것 같군요.  읽고 싶지 않으면 읽지 않아도 됩니다. 자칫 오염될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되묻고 싶군요.  영남패권이나 친노에 대해 얘기하는 그 동기나 취지가 반사회적인 것에 대한 혐오 내지 분노라는 정의감이라면 당연히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여 내 생각을 초월한 뭐가 있었는지라는 호기심이 생기는 게 인간이니까요... 

내가 출간된 님의 책에 대한 관삼을 갖듯 말입니다.  그러나 님의 소통하는 태도를 보니 읽을 필요 없다고 여깁니다..  읽어야 할 책이나 공부할 자료가 넘쳐 나니 말입니다. ]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친구가 다 있나?

패션의 말을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그 전자책은 영남패권을 다룬, 상당히 오래 전에 나온 책인 것 같다. 영남패권과 지역차별에 관해 웬만한 내용은 거의 다 다뤄진 상태다. 그냥 그 책이 그 내용을 잘 다뤘다는 정도라면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미 다 언급됐고 숱하게 토론한 내용들이니까. 이 토론에서 그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다. 

"당신의 책이나, 주장 또는 아크로나 기타 영남패권/지역차별 담론이 다루지 못한 내용을 그 전자책이 다루고 있으니 그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갖고 얘기해야 토론이 가능하다."

이런 얘기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면 그 내용 즉 지금까지 나나 다른 사람들이 다루지 못했던 영남패권/지역차별 담론의 어떤 내용을 그 책이 담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소개해야 한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정도 설명이라면 굳이 그 책을 읽지 않아도 토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는 것은 토론 이후에나 또는 토론 진행 도중 정말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거시기하지만 내가 책을 낸 것은 그동안 다른 지역차별/영남패권 담론에서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좀 민망하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 지역차별은 지역 '감정'이나 문화, 사회 관습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영남패권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재창출하기 위한, 선거에서 백전백승하는 무기로 적극 활용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는 수준으로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 호남 차별의 세 가지 구조 즉 *경제산업적 낙후 *공공과 민간 분야의 인사차별 *광범위한 인종주의적 혐오 현상 등을 설명하고, 혐오 현상이 앞의 두 가지 차별을 합리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영남패권과 친노패권의 관계. 호남 지역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호남의 정치적 선택의 정당성 즉 정치적 상징자산을 되살려야 하는데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훼손한 세력이 친노이다. 그래서 영남패권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첫 걸음이 친노패권의 척결이다.

- 호남이 영남패권과 싸워서 이기려면 현재처럼 과거의 정치적 정당성(민주화 기여)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장성(영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의 지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호남은 부국강병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영남패권은 이제 한국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등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따져서 그렇다.

이 가운데 특히 내가 비중을 두는 것은 마지막 부분, 이제 호남도 관념적인 명분론을 버리고 실사구시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부분이다. 호남 문제의 객관화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남이 이기려면 그 명분이 다른 지역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즉, 호남 문제의 해결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는 것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남패권이 한국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그 영남패권의 극복은 다른 말로 호남차별의 극복과 동전의 양면이며, 호남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지금과 다른 정치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은 이 나라와 국민의 삶을 미래지향적으로 개선해갈 수 있는 대안의 제시 여부에 의해 갈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 지역차별/영남패권 주제에서 이 문제를 다룬 담론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제 논의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의 토론은 이 부분에 집중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패션의 얘기 가운데, 사적 유물론을 비웃는 게 있었다. 생산력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친구가 사적 유물론의 한계를 말하는 게 황당무계 그 자체다. 그 이유도 웃긴다. 한국에는 봉건제 단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친구는 생산력도 모르고 생산관계도 모른다. 그런 개념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사적 유물론을 논하고 비웃는다.

경제사적으로 봉건적 생산양식의 핵심은 농민과 토지 소유의 관계이다.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사회의 핵심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다. 그리고  생산 주체인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로부터 토지를 빌려 경작하며 그 수확의 일부를 지주에게 지대(rent) 형태로 제공한다. 결정적으로 이들 농민은 토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즉, 신분제의 속박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 시대 지주가 봉건영주이냐 아니냐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런 식의 봉건제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토지는 양반이라 불리는 대지주의 소유였으며, 현실적으로 일반 농민이 대지주가 되는 것도 그 토지를 벗어나 신분의 자유를 얻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신분의 제약도 분명히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이 자기 신분을 벗어나 공장의 노동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즉, 조선의 경제 인프라는 자본주의로 진화 발전하는 데 실패한 봉건제였다.

패션은 사적 유물론이 유럽에서만 실현됐느니 하는 헛소리를 한다. 사적 유물론의 기본도 모르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이다. 생산관계 즉 생산양식의 발전은 특정 지역의 발전 모델이 그보다 진화 속도가 느린 지역의 발전 모델을 통합하는 형태로 확산된다. 서양식 근대화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전세계의 일반적 생산양식, 생활방식으로 정착하는 과정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조선이 자본주의로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봉건제도 없었고, 사적 유물론이 틀린 거야? 병신같은 소리다. 생산양식의 발전이 얼마나 거대한 역사적 규정성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서양의 봉건제와 무척 다른 봉건적 생산방식을 갖고 있었던 조선이 결국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것이 사적 유물론의 현실 정합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