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다시 정의의 문제입니다.


호남은 박정희 정권 이래로 경제개발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인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호남이었습니다. 60년대에 전체 국민의 20~25% 수준이던 호남의 인구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10% 정도로 줄었습니다. 경제개발의 효율을 위해 수도권과 영남을 잇는 경부 라인에 국가의 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방식이 필요했다는 것이 영남권 특혜와 호남의 소외를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미국의 웬만한 주보다 작은 나라에서 특정 지역에 자원을 몰아주는 방식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런 방식이 정말 효율적이었다면 이제 그 과실이 오랜 기간 소외됐던 호남과 여타 지역에게도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해마다 국회에서 예산을 심의할 때면 영남 특혜 시비가 벌어집니다. 대한민국의 자원을 계속 영남 위주로 편성하는 구조가 더 견고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호남은 그 희생에 대한 위로와 배상은커녕 가장 집중적인 혐오와 배척, 모욕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TV 드라마 등에서 혐오스러운 캐릭터를 묘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전라도 사투리를 야비한 어조로 내뱉게 하는 것이라는 점은 이제 국민 상식이 되었습니다.


제일 황당한 것은 개념의 전도 현상입니다. 지역주의란 용어는 특정 지역의 배타적인 기득권을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개념은 지역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거론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질됐습니다. 강도를 신고하는 사람이 강도범이 되고, “불이야외치는 사람이 방화범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지역주의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왜곡하는 악마의 도구입니다.


우리나라의 좌파 진영은 이런 현상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지역주의 문제를 거론하는 목소리에 대해 이들은 지역이 아닌 계급으로 접근해 해결해야 한다고 천편일률적으로 반응합니다. 계급 문제가 해결되면 지역 문제 따위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계급 문제는 언제쯤 해결된다는 건지, 그 때까지 지역차별 문제의 온갖 폐해를 방치해야 한다는 건지, 왜 계급 문제가 아닌 장애인이나 다문화 및 성 소수자 등의 문제는 지금도 진보가 열심히 거론하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결국 좌파 진영은 일종의 계급 환원론으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 구조이자 모순의 집약물인 지역 차별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해결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역차별 담론의 시민권을 부당하게 빼앗는 횡포입니다. 영남패권 중심의 기득권 구조에 대항하는 세력의 주력군이 호남이었습니다. 좌파 진영은 호남의 피와 땀의 과실은 챙기면서 그 정당한 대가 지불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좌파 진영의 제도권 대리인(agent) 역할을 하는 친노 패권에서 극단화되어 나타납니다. 현실적으로 친노 세력은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이는 정치 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집단입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부터 시작해 주요 친노 정치인들은 모두 호남의 지지에 힘입어 국회의원과 지방정부의 선출직 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친노 세력은 호남 정치인들과 호남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과 나아가 호남 정치 자체를 모욕하고 부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을 위협하여 호남 정치인들이 아닌 친노 정치인들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남패권이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온 호남 혐오감은 친노 세력들에 의해서 이렇게 매우 요긴하게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진입한 친노 정치인들 외에도 광범위한 좌파 성향의 교수와 지식인들, 언론, 문화계 등에서도 호남 혐오 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크게 보면 우리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86세대가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누리는 언론과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에 호남의 피와 땀이 짙게 배어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호남 혐오와 의사결정 구조에서의 배제는 사실 호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의사결정이 영남패권의 소수 이너서클에 의해 독점되는 것은 국가 전체의 합리성을 훼손하고 궁극적으로 선진국 도약에 필요한 국가 시스템의 업그레이드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진입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영남패권의 극복이 미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도입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방식이 영남패권의 기득권 때문에 극복되지 못하고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영남패권 엘리트들의 동종교배형 지배구조는 필연적으로 연고주의의 봐주기를 통해 부정부패의 고착화를 낳고 이는 국가 경쟁력의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의 공동체를 바로잡고 보다 풍성한 결실을 낳게 만드는, 집으로 치자면 주춧돌이나 기초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지역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 나라는 주춧돌이 빠진 고대광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결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보이지 않지만 강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성하나 그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자가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역평등시민연대가 이 사회에 발언해온 메시지들은 결국 정의에 대한 갈구입니다. 호남의 한풀이 아니냐구요? 아마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호남의 한풀이에 그치지 않고 이 나라에 가장 결핍된 자산인 정의를 바로 세우고 결국 이 나라를 보다 좋은 나라,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열쇠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희는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메시지는 호남을 무조건 옹호하고 현상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영남이 절대악이 아닌 것처럼 호남도 절대선이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사실도 아니고 호남이나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억지일 따름입니다. 특히 호남의 좌파 성향 오피니언리더들의 반시장·반기업 정서는 호남의 자승자박이 될 뿐이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이 책 <호남과 친노>는 지역평등시민연대가 2013년 출범한 이후 진행한 강연회, 토론회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에 발표한 메시지들을 모은 것입니다. 직접 발언은 제가 했지만 그 핵심 메시지들은 지역평등시민연대의 모든 회원들이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다듬고 정리해서 공개하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분들이 도와주신 결과입니다. 지역평등시민연대의 고문이신 원로 소설가 송영 선생님 그리고 서태식 님, 김영한 님, 이승훈 님, 서정훈 님, 김수영 님, 오영종 님, 오종배 님, 모아라 님, 배상원 님, 박춘림 님, 윤준식 님, 윤기영 님, 정승윤 님, 유춘희 님, 한기양 님, 윤성규 님, 허윤정 님, 박시현 님, 길도형 님, 이일 님, 주성식 님, 조미영 님 등이 이 책의 발간을 지원하고 격려하고 재촉해 주셨습니다.


또 정운옥 영진문화사 팀장님이 잦은 변경 요구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잘 처리해 주셨습니다. 또 인터넷 토론 사이트 아크로(theacro.com)의 여러 논객들도 중요한 문제 제기를 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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