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에서 문재인과 친노만 적출해 낸다면, 최소한 문재인만이라도 적출해 낸다면 김종인은 그럭저럭 그의 아버지인, 전북 순창 출신이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며 지금도 법조인이라면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가인 김병로 선생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친노는 폐족이 되었어야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의 오만함과 손학규의 한심한 짓, 그리고 노무현이 고초를 당하고 자살에 이를 때까지 행적이 묘연했던 문재인이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노무현의 죽음은 검찰의 오만 때문'이라는 뜬금없는 시체팔이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친노는 화려하게 부활했고 문재인이 대선 후보까지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양심이라는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과연 문재인이 정치인으로 어떤 행적을 그려왔는지. 어떤 경력이 있는지를 말이다. 정치적 경력이 전혀 없는 전두환이 518 학살을 딛고 대통령이 된 것처럼 문재인은 친구의 시체를 팔아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문재인이 시체팔이 후에 정치적 경력을 차분히 쌓아왔다면 그럭저럭 용인이 될 수 있겠으나 문재인이 도대체 정치적 경력을 쌓거나 쌓으로고 노력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아니 정신이 올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문재인을 지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알량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독재 정권 타도의 방편으로 문재인을 지지한다'면 그 빌어처먹을 인문학적 소양은 쓰레기통에나 처넣어라~!


문재인과 친노의 존재는 대한민국 미래의 재앙이며 호남의 한(限)에 기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김종인은 그의 아버지 가인 김병로 선생의 생애를 생각한다면, 호부호자와 호부견자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당에서 최소한 문재인을 적출해 낸다면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김종인 당신이 더불어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다면 내 기꺼이 당신에게 표를 던질 의향이 있지만 최소한 내 표는 문재인에게 갈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아래는 김병로 선생의 일대기를 서술한 것으로 출처는 여기를 클릭. 대한민국 사법부가 오늘날 '권력의 시녀'로 비야냥을 받는 이유는, 기억에 의하여 기술하자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과 3대 대법원장을 빼놓고는 줄줄이 친일파 행적이 있는 인물들이 대법원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추상과 같은 법의 실행에 있어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친일파들이 대법원장을 역임하니 법이 권력에 굴종하고 결국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죠. 이렇게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비야냥을 받고도 족보에는 자랑스럽게 대한민국 대법원장...이라고 둥재했겠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은 지금 법조인이라 칭하는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김병로라는 인물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몇십 년 전에 이런 법조인이 대한민국에 있었던 사실이 놀랍고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의 삶을 잠시라도 살펴보겠습니다. 

■ 일제강점기,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가 무료 변호

우리는 흔히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법조계에 있었다면 친일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최고 엘리트 코스와 지식인 계층이었던 법조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1887년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1902년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의 문하가 되었다가 일본 군함을 견학한 뒤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서구의 물질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병로 선생은 18세 나이에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면암 최익현 의병부대에 합류했다가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김동신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의 일본인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을 더 이상하지 못하자 창흥 의숙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1910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납니다. 

'경술국치'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던 선생은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도쿄 유학을 떠나, 1913년 메이지대 법과와 니혼대학 법과 졸업장과 주오대학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합니다. 1919년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사임하고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후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병로 선생은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상해임시 정부요인 안창호,여운정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부터 독립운동과 관련된  '김상옥 의사 사건','2차 의열단 사건','6.10만세 사건','광주학생독립운동' 등에 직접 변호를 맡아 뛰어 다녔습니다. 

이런 그를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김병로 선생이 연사로 나서는 집회는 금지되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8.15 해방이 될 때까지 금주,금연 등의 절제된 생활을 하며 은둔 생활을 했으며, 나라 없이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가인(거리의 사람)'이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친일 판사들의 친일활동에 대한 법원 결정 출처:한겨레


똑같이 일본 유학을 가서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로 살았지만, 김세완 판사는 독립운동가 14명에게 32년10개월이라는 형량을 내리고도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병로 변호사는 능력 있는 판사였지만, 법복을 과감히 벗고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호를 맡으며 그들을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과연 누가 참다운 애국자이며, 민족을 위했던 사람인지 상식적으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 공직자에겐 청렴이 우선이다.

대한민국 검찰과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국가의 세금으로 국가를 향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권력을 가지고 돈을 탐하고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츠 여검사'를 비롯해 대법원장 임명 때마다 위장전입은 물론이고 부동산 투기 의혹, 탈세 등 일반인이 저지르면 구속되는 일들을 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저질렀던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합니다.

김병로 선생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법원은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법원 직원들은 군용점퍼를 입고 언 잉크병을 숯불로 녹여 사무를 봤습니다. 

연필은 3cm가 남을 때까지 썼고, 담배는 아예 반으로 잘라 파이프에 꽂아 피웠으며, 점심은 항상 자기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지방법원 판사들도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홀로 '한성라사'에서 맞춘 국산 양복만 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무부는 서소문 법원청사 뒤편에 있는 귀속 재산을 법원 용지로 쓰라고 건의했지만, 그는 한번에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미군정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지독히도 '선비형 법률가'로 대쪽같은 청정함을 유지하면서 원칙을 지켰던 법조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서 나라의 산업을 생각하고, 국가의 재산을 아꼈던 그의 삶은 진정한 공무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맞장 뜬 대법원장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 선생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이었고, 너무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할 수 없이 대법원장에 임명했는데, 그 대쪽같은 성품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모습.앞줄 왼쪽 열번째가 김병로 대법원장


김병로 대법원장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특별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6.6사건은 중부 경찰서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찰의 이 행위는 직무를 초월한 과잉며 불법이 올시다.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국회와 정부 당국은 비상시국에 적정한 정치적 조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대법원장으로 반민특위 해산을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반민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를 당초의 1950년 6월20일까지에서 1949년 8월31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법개정안을 가결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50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법원은 국회의원에게 징역 3-10년의 가벼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또한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 사건,윤재구 의원 횡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또한,이승만 독재를 반대하는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당방위로 그를 풀어주자, 이승만은 다시 부산정치 파동 (부산에 공산 게릴라가 침투했다고 조작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의 정치공작)을 구실삼아 서민호 의원을 구속했지만, 법원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판결에 대해 이승만은 화가 나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있습네까? 현역장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무죄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네까?' 
그러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당연하다는 듯 잘라 말했습니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습니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김병로 대법원장이 대법관들에게 강조했던 말)


김병로 대법원장이 독립운동가 변호나 청렴한 생활도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가 사법부의 독립을 강력하게 외쳤고, 그것을 위해 대통령이 화를 내도 판사들을 막아주며 사법부를 지켰다는 점도 우리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을 그를 미워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도 버티고 버텨 70세의 나이로 정년퇴임을 합니다. 그는 정년 퇴임한 후에도 변호사 개업도 하지 않아 '전관예우'와 같은 일은 하지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퇴임하면서 했던 말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 대법원을 이끌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동안 가장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전국 법원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인권옹호를 위한 사건처리의 신속을 강조한 것이 그렇고,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로 살라한 것이 그러했다. 나는 전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강조했던 대법원장은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또 다시 말을 합니다. 

"나는 그래도 관사와 좋은 차과 상당한 보수를 받았으나, 법원서기들 봉급은 쌀1가마니값 정도에, 초임법관들이 2가마 값 정도였고, 10여 년 경력의 중견법간들도 봉급이라야 쌀3가마니 값을 넘기지 못했소. 이런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법질서 확립과 인권옹호를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하는 법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소. 그러나 천하가 일자리는 커녕 먹을것, 입을것이 없고, 발 뻗고 잘 방한 칸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얼마나 됐든 국록을 받은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소!"

만약 김병로 대법원장이 살아서 대한민국 대법원장으로 임명되면 아마 대한민국 대법관과 판사 대다수가 몽둥이찜질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굶어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알고, 국록을 받은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그에게 '나는 떳떳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법조인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분명 대한민국 법조계에도 김병로 대법원장 같은 검사나 판사,대법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람보다 더 썩은 인물들이 대한민국 사법부를 쥐고 권력자의 도구로 대한민국 법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정치 공작에 놀아난 국회와 대한변호사 협회가 그를 공격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당당히 맞섰습니다. 

"나는 단언하나니 오늘날까지 재판에 있어서나 사법 운영에 있어서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장래에도 없을 것을 확언한다. 독립된 사법 운영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다."

변명도 아닌 당당한 그의 이 말에 그를 향했던 모든 비난은 잠잠해졌습니다.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사람.
독립된 사법 운용을 위해 당당했던 인물.

오늘날 우리는 김병로 대법원장 같은 사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권의 도구로 사람을 잡아들이는 검찰이나, 정치권의 말 한마디에 판결을 바꾸는 판사만은 없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