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는 유난히 불행의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두 타고난 천재들이다. 오스트
리아의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1759~1824) 이야기는 조
금 특이하다. 귀족가문이고 축복 받은 환경인데 세 살 때 시력을 잃었다니 참혹한 느낌
마저 든다. 환경이 나빴거나 평범한 아이였다면 이런 느낌이 덜 할 것 같다. 재능과 열
정은 뛰어나 작곡, 연주 등 다방면 활약을 했는데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대부분 유실되고
남은 것이 몇 곡 되지 않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소품 <시칠리엔>. 이름 있는 연주
가라면 누구나 녹음을 남기고 있다. 자크린느 듀프레, 바이올린의 지넷 느뵈, 그러고 보
니 두 연주자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 못지 않은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이 곡은 마치

출발부터 참혹한 상처를 안고 시작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애달픈 삶을, 그러나 너그럽게 받아
들이는 모습을 그려낸 것 같은 아름답고 애잔한 곡이다. 비슷한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듀프레와 느뵈의 연주 모두 큰 감동을 주는데 특히 프레이징이 날카로운 느뵈 연주가 가
슴을 찌르듯 아프게 다가온다.
 
 겨울 동안 오직 한차례 시내 나들이를 했다. 오랜만에 회현동 LP 점에 들렀는데 주인장
이 신반 LP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음악식구"들 사이에나 있는 무상선물이다. 흘깃 보니
이탈리아의 고집쟁이 첼리스트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첼로소품집>이다. 백발에 엄격한 수
도사 같은 인상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흔치 않은 마이나르디 소
품집인데 목록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칠리엔>이 있어 무엇보다 반가웠다. 반갑다,LP! L
P 신반을 만져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음반을 만지는 촉감부터 정겹기 그지없다. 슈만의 <
민속풍의 소품 5곡>, 그라치올리의 <아다지오>, 슈베르트 <아베마리아>등 첼로의 유연한
호흡과 잘 어울리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곡들을 살핀 뒤 문득 한가지 걱정이 생겼다.
이 사람은 루바토나 비브라토와 담을 쌓은 사람인데 섬세한 배려가 필수인 이 곡들을 어
떻게 처리했나? 그의 바흐<무반주첼로모음곡> 연주의 파격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철
저하게 노래는 배제하고 형태와 균형감 있는 음질에 치중한다. 그의 옹호자들은 '첼로의
벨칸토'란 호칭을 그에게 부여한다. 음질이 고르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소리로 연주한다는
뜻이다.
 
 바늘이 긁어주는 LP 소리는 여전히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칠리안>
을 서둘러 듣는다. 예상대로 다른 연주들에 비해 담담하고 수수하다. 비브라토 같은 건 구
경할 수 없다. 첫 느낌은 아무래도 좀 싱겁다는 것이다. 그의 연주는 몇 번이고 반복해 들
어야 겨우 귀에 익숙해진다. 그는 조미료 없는 선식(禪食)을 제공하고 있다. 익숙해지지 않
으면 그 맛을 알기 힘들다. 선율에 꾸밈이나 과장이 없는, 순수하고 담백한 원형을 그대로
살려내는 연주, 차츰 익숙해지면 순도 높은 선율의 깊은 맛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선
식으로 몸이 정화되듯 그의 연주에 익숙해지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의 지지자
들은 이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슈만의 <민속풍의 다섯 개 소품>은 작곡자의 정신이 가장 
건강할 때의 그의 감성, 취향이 잘 배어있는 곡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서 마이나르디 연주가
가장 돋보인다. 빠른 리듬의 활기찬 1곡에서 짧고 간결하게 처리하는 악구들이 살아있는 생
물처럼 퍼덕이는데 음의 형태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그의 연주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조미료 없는 연주를 한참 듣다 보니 슬그머니 다른 연주와 견줘보고 싶어졌다. 소곡 연주에 
탁월한 감성을 보여주는 중국 태생 지안 왕의 슈베르트 <아베마리아>,같은 곡인데 한없
이 달콤하고 싱그러운 음악으로 돌변한다. 지안 왕의 이 연주는 절창이다. 소곡 연주에 누
구보다 뛰어난 감각, 세기를 보여주는 그는 마이나르디의 대척점에 있다. 십세때 문혁의 소
동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중국을 찾은 아이작 스턴 앞에서 연습곡인 <이끌레 소나타>
를 연주하던 모습, 금방 밭에서 일하다 들어온 것 같은 촌스런 더벅머리 소년의 일화는 유
명하다. 그가 지금은 헌헌장부가 되어 중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아베마
리아>도 그렇지만 가브리엘 포레의 <자장가> 연주도 일품이다. 이런 연주를 들으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소곡 하나로 그 연주가의 면모를 알게 되는 것이다. 로스트로포
비치는 병상에서 친지들이 들려준 자신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 많은 연주 가운데 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일까? 그 연주가 그의
최고의 연주이고, 다른 연주가를 포함해도 최고 연주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때 그의 바흐
<무반주첼로모음곡> 연주를 듣고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의 <아르페지오네>를 듣고
생각을 고쳤다. 마이나르디가 연주하는 슈만의 <민속풍의 다섯 개 소품>과 마리아 테레지아
의 <시칠리안>등 정감 깊은 소곡들을 조용한 시간에 집중해서 들어보면 그가 제공하는 정화
된, 순도 높은 음악의 깊은 맛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