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야당 분열, 알고나 욕합시다!

지은이 강준만 | 쪽수 312| 판형 152×225(신국판)

15,000| 분야 정치사회 > 한국 정치

ISBN 978-89-5906-393-2 03300 | 출간일 2016226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가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싸가지 없는 진보’

 

▣ 출판사 서평

 

“왜 호남은 진보에 등을 돌렸는가?”
“왜 진보의 이름으로 정치를 죽이는가?”
“왜 진보는 반감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는가?”

 

야당 분열, 알고나 욕합시다!

 

야당 분열과 분당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입을 열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호남 분열’, ‘야당의 절대적 무능’, ‘계파 갈등’, ‘문재인 vs 안철수’, ‘안철수 분당’, ‘친노의 정체’, ‘언론과 지식인’ 등을 주제로 분당의 원인과 본질을 파헤친다. 이에 앞서 강준만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야당 지지율이 경쟁 정당의 반토막 수준이라면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며, 야당과 진보의 성찰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변화는 없었다. 여전한 ‘남탓하기’, ‘진영논리 함몰’, ‘기득권 챙기기’, ‘상대편에 모멸과 상처 주기’로 일관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독자들이 궁금해할 분당의 내막에 대해 다이내믹한 이야기를 펼치지만, 핵심은 ‘정치의 본질’과 ‘인권’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일부 야권과 지지자들은 “분열은 배신이자 자멸”,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분당파들은 정권교체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강준만 교수는 “욕심내지 말자”고 일축한다. 왜인가? 첫째, 그동안 야당과 진보의 행태가 ‘정권교체’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둘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그런 발상에 대해 “새누리당 지지자를 ‘역사의 죄인’보다 못한 사람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운동권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셋째, 선거보다 중요한 게 ‘인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야권 지지자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에게 온갖 모욕과 적대를 표출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모욕부터 ‘지역’(호남)에 대한 모멸까지 전방위적이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폐단이자 야당 분당의 주된 원인으로 ‘정치의 종교화, 인물중심주의, 지도자 숭배’를 거론한다. ‘정책’과 ‘이슈’보단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 중심으로 모든 걸 환원하는 행태가 정치를 피폐하게 만들고, 소통과 화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정쟁을 종교 전쟁으로 몰고 가고, 정치를 종교화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이제 종식시켜야 한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주된 메시지다.

 

호남 차별을 먹고사는 진보

 

진보의 실천적 제1원칙은 부당한 차별과 모멸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부당한 차별과 모멸을 용인하거나 주도하는 진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일부 진보는 특정 지역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모멸을 전제로 진보를 해보겠다고 그러니, 그걸 어찌 진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진보라고 해야 한다면, ‘호남 차별을 먹고사는 진보’라고 불러야 하나? 야당은 명실상부한 전국정당화를 위해 호남 색깔을 지우려고 애를 쓴다. 이는 야당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개혁·진보 세력도 동의하는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늘 명분은 개혁·진보를 내세우지만 호남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국 정치인의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겠건만 정치인의 물갈이 대상도 늘 호남에 집중된다.

 

‘분당 사태’를 대하는 이중성

 

2003년 민주당 분당 정국에서 진보 언론이 어떤 논조를 폈는지 묵은 신문들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친노 그룹이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을 때, 당시에도 진보 언론은 여당이 분열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가? 정반대였다. 구경만 하거나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당의 주류가 탈당을 막을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2003년의 ‘기획 탈당’의 책임은 주류에게 있는 반면, 주류가 양보만 하면 막을 수 있었던 2015년 탈당의 책임은 탈당파에게 있다는 이중 기준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여당일 땐 분열해도 괜찮지만, 야당일 땐 분열하면 안 된다는 논리인가? 대통령 권력의 후원을 받은 분열은 좋지만, 그렇지 않은 분열은 나쁘다는 뜻인가? 아니면 열린우리당은 마음에 들지만 안철수와 그 일행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런 내용 중심으로 비판해야지, 분열 자체는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논리는 자가당착 아닌가? 아니면, 똑같은 일이라도 내가 하면 개혁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반개혁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독선사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독선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며 상종하길 꺼린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를 대할 땐 특정 당파 집단의 일원이 되거나 익명성을 얻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이념이나 당파성의 옹호자가 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감이나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런 토양에서 정치인이나 논객의 인기는 반대편을 조롱하거나 아프게 만드는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언론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자세로 그런 증오의 언어를 미주알고주알 열심히 보도하는 ‘증오 상업주의’에 탐닉한다.

 

‘10대 0’의 정치 

 

순수는 독선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룬다. 순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순수를 무기와 명분으로 삼아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간다. 정치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유권자들은 그런 명쾌한 접근법에 환호한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에 등을 돌린 가운데 그런 소수의 전사들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정치권 역시 그런 ‘시장 논리’에 굴복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10대 0’의 정치다. 여야 싸움에서건 같은 당내에서 싸움에서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10, 상대편의 정당성을 0이라고 주장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진실은 7대 3이거나 6대 4이거나 5대 5일 텐데도 언행은 ‘10대 0’에 근거하는 과장과 과격과 극단을 치닫는다.

 

정치의 종교화로 인한 소통 불능

 

이념의 종교화는 정치의 종교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종교화된 정치 역시 광신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지만, 그렇게 어두운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놀라운 헌신과 연대와 결집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바로 그런 경우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정치의 종교화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게 과연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절박한 상황이 아닌데도 절박한 열정이나 광신을 갖고 선악 이분법으로 임하다 보면 상대편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정치의 주요 문제는 바로 이런 소통 불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 본문 중에서

 

안철수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언론은 문재인·안철수의 리더십을 과거의 3김과 비교하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리더십 문제에 관한 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의 여건이 과거에 비해 더 나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 제3의 중도 정당을 성공시킨다는 건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건수만 잡히면 물어뜯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도처에 진을 치고 있는데, 무슨 수로 그걸 넘어설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안철수는 제갈량의 ‘천하 3분지계’를 이뤄낼 것인가”」(본문 42~43쪽)

 

호남 몰표는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바로 그 호남 몰표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니들은 죽은 듯이 입 닫고 지내라”고 강요하면서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작태, 이게 바로 그들의 민낯이다. 호남인들이 이젠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섰더니, ‘민중’이니 ‘국민’이니 ‘진보’니 하는 거대 레토릭을 써가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댄다. 이런 ‘싸가지 없는 진보’를 언제까지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싸가지 없는 진보’」(본문 71쪽)

 

진보 좌파는 호남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진보의 이상향’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실도 무시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려면 자기 자신보다 사랑할까? 진보 좌파도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한다. 잘살고 싶어 한다. ‘퇴폐적이고, 타락하고, 물질주의적인 부르주아 가치’를 향유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자기들은 그러면서 이들은 호남에 대해서만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이들은 호남 민중의 욕망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썩어 빠진 호남 엘리트를 공격하는 것인데 왜 그러느냐고 항변한다. 「‘서울 제국주의’에 찌든 진보 좌파」(본문 82쪽)

 

지금 한국 정치는 유권자가 볼 때엔 좌우左右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선거철에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 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고위 공직을 출세로 간주하는 유권자들은 돌아가면서 나눠 먹으라는 ‘분배의 정의’에 투철하다. 선거 때마다 ‘물갈이’가 대폭 이루어지면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지만, 물갈이의 주요 원인은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는 자신의 출세욕 충족을 위해 국민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유권자들의 시각이다. 「“도둑놈들 사이에서도 분배의 정의가 필요하다”」(115~116쪽)

 

그런 점에서 앞서 소개한 조대엽의 주장도 듣기에 딱하다. 그는 친노패권주의에 ‘선동을 위한 기획의 혐의’를 제기하는데,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친노패권주의에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선동을 위한 기획’이라는 이야긴데, 아니 당내에 있는 사람들도 그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데 왜 당 밖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날만 새면 친노패권주의를 지탄하는 종편 TV의 어디에서도 구체적인 친노패권주의의 증거는 없다는 게 무슨 근거라도 된단 말인가? 게다가 친노패권주의와 ‘실질적 호남 민심’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도 영 이상하다. 친노패권주의와 ‘정치 혁신’을 분리해 말하는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친노 프레임’은 선동을 위한 음모인가?」(162쪽)

 

순수와 정치의 만남이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주의자들은 가능성을 추구하는 정치를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대하기 때문에 타협을 거부하는 극단적 강경파로 활약하기 마련이다. 어느 집단에서건 이런 강경파는 소수임에도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들의 강점은 뜨거운 정열과 헌신이기 때문이다. 순수는 독선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룬다. 순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순수를 무기와 명분으로 삼아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간다. 정치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유권자들은 그런 명쾌한 접근법에 환호한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에 등을 돌린 가운데 그런 소수의 전사들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정치권 역시 그런 ‘시장 논리’에 굴복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10대 0’의 정치다. 「정쟁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가는 순수주의자들」(204쪽)

 

지방에서 인 서울 대학으로 인재 유출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부모의 학력과 소득 수준이다. 물론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인 서울 대학에 많이 진학한다. 지방 엘리트는 대부분 자녀를 인 서울 대학에 보내며, 부유층은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정도는 갖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 당선자 중 비수도권 광역 시·도지사 9명 중 8명이 서울, 나머지 1명은 경기 과천에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자가나 전세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구 자택은 전세로 얻은 대신 서울 강남 3구에 집을 갖고 있는 의원이 31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에서 기관장을 지낸 사람들은 퇴임 후 거의 서울에서 산다. 예컨대, 2006년 6월 현재 생존 중인 역대 전북 도지사 12명 중 전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단 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방 엘리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서울 시민이 될 수 있는 탈영토화의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는바, 이들에게 내부식민지 체제의 타파는 정치적·의례적 수사修辭의 성격이 강하며 심혈을 기울여 쟁취해야 할 목표는 아니며 그럴 만한 동기부여도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지방 엘리트의 ‘탈영토화’」(228쪽)

 

직접민주주의와 풀뿌리 정치는 지방의 작은 지역에서부터 꽃을 피우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풀뿌리 정치는 ‘빨대 정치’로 전락했다. 중앙 정당들이 지방을 식민지화한 가운데 빨대를 꽂고 단물만 빨아먹고 있다. 지방의원은 국회의원의 ‘몸종’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지방 주민들은 각종 연고에 얽혀 그런 식민 체제에 갇혀 있다. “지역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역 주민들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들을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들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의 영역은 방치되어 있다. 빈껍데기뿐인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지방자치가 생산해낼 대중의 냉소와 그에 따른 보수성을 생각하노라면, 그야말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게 아닐까? 「‘지방 소멸’로 인한 ‘국가 파멸’의 가능성」(251~252쪽)

 


profile

仲尼再生 " 夜 의  走筆  " 취임사

 

저를 아크로 주필로 추천하시는 회원여러분의 글을 읽고, 오늘 본인은 본인의 향후 거취를 놓고 깊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끝없이 되뇌며, 다수 회원의 요청대로 아크로 "밤의 주필" 직을 기꺼이 수락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내 일신의 안녕 만을 위한다면 봉급 한 푼 못 받는 이 명예직을 수락할 수 없었겠지만, 이미 공인 아닌 공인이 된 몸으로서 이 위기의 시대에 역사가 제 어깨에 지운 이 짐을 떠맡기로, 본인은 이 아름다운 밤 위대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