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뎌 내일 모래면 3월, 기다리던 봄이다. 이제 강아지와 마을산책을 할 수 있겠다.

 <세계시민>이라는 좀 거창한 타이틀의 계간지가 있다. 이제 겨우 봄호인 4호 출간을
앞두고 있는데 편집자가 원고청탁하며 기간행된 세권을 보내줬다. 거기 2호에 독일인
베른하르트 젤리거란 교수가 쓴 <독일통일이 한반도 통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좀 긴 글이 있는데 읽어보고 많은 것을 새로 깨달았다. 이 사람은 한국생활도 다년간 경험
해서 한국 지식인, 관리들의 행동과 사고방식, 정치상황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말하자면
독일인 지한파이다.

 나는 지금까지 독일통일의 일등공신은 빌리 브란트, 에곤 바르, 헬무트 콜, 등 당시 독일
정치인들의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 그리고 외교력, 그리고 독일 여당 야당 할것 없이 통일
에 대해 일치된 합의 등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독일에 가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내 믿음은
자칭타칭 통일전문가라는 사람들과 언론의 논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첼러거에 의하면
통일연구와 견학한다고 1000여명이 독일에 왔으며 한국인 300명이 독일통일과 한국통일
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독일 당국에 제출했다 한다. 그들은 모두 돌아와서 통일 학자,
전문가 노릇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독일사람이 쓴 한편의 글이 제시하는
진상을 알 길이 없었다는 게 쉽게 이해가 안된다. 젤러거는  통일연구 보다 관광에 시간을
더 할애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암시를 슬그머니 흘리고 있다.

 젤러거에 의하면
서독인들은 사실 통일에 별다른 꿈도 의지도 없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그
열망은 동독에서 타올랐다. 그것도 진화할 수 없을만큼 맹렬하게.
Wir sind das Volk- 동곡에서 시위자들이 초기 외친 구호는 '우리가 주권자다' 였다. 그것이
곧 Wir sind ein Volk, , 즉 '우린 한민족이다'로 급변한다. 말할 것도 없이 동독 주민들이 통일
열망을 드러낸 것이다. 젤러거의 글로 돌아가보자.
-시위대가 외쳤던 구호는 1990년 3월 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행된 자유선거로 선출된 동독인민의회에가 공식적으로 확정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오늘날 '흡수'라고 부르는 통일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서독의 어떤 역할도 없이 민주적으로 구성된 동독의회
에서 합법적으로 취해진 결의로 시작된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이 글의 핵심 키이다.
다시 젤리거 글을 인용해보자.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부분이 독일통일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흡수
통일을 밀어부친 서독의 통일정책이 주요 동력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명백하게 잘못된 견해는 없을 것이다.
서독의 역할은 동독의 강한 통일요구를 수용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헬무트 콜이 동.서독 마르크 교환가치를 1; 1로 동등하게 파격적으로 잡아주고 빠른 통일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마져 동독에서 넘어오는 대규모 이주민의 압박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책이었다고 한다.1945~1949 사이에 4백만이 서독으로 넘어왔고 동유럽에서
천만 이상의 난민이 들어왔다. 한국처럼 3만도 넘지 않은 탈북자에 대한 차별 같은 문제는 발생하
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