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히또님과 parrhesia님께서 제시한 '기술발전과 실업률'과의 관계는 '루가노 리포트'의 존재를 안다면 굳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20세기 냉전 시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고 이 대립은 더 많은 소비시장을 확보하려는 경쟁이며 이 경쟁은 결국 '규모의 경제'를 통한 효율의 경쟁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소비 시장을 확보한 자본주의는 '규모의 경제를 통한 효율의 경쟁'에서 공산주의에 승리했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는 1980년대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의 '스타워즈 비디오 데모 버젼'이라는 사기극에 쫄은 구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역할도 상당히 작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도, 소비 시장이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 더 적더라도 자본주의는 종내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적당히 빈곤층을 무시하고 갔으니까.


자본주의는 효율이라는 요인을 에너지로 달리는 두발자전거와 같으며 효율이 떨어지면 두발자전거는 옆으로 쓰러진다. 그런 자본주의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루가노 리포트'이다.


물론, 가상의 이론이지만 있음직한 가설로 대두된 '루가노 리포트'는 '자본주의의 존재를 위해 인류의 30%는 줄여야한다는 주장'이다. 역으로 인류의 30%라는 잉여인간들은 자본주의의 효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류는 '고귀한 인격을 가진 생명체가 아닌 체제 유지를 위한 재화 취급을 더 많이 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인류가 돼지를 선택한 역사와 같다. 즉, 수많은 돼지 종류 중에서 고기를 더 많이 제공하는 돼지들이 인류에 의하여 선택이 되고 개량되어 온 것처럼 기술도 효율을 우선으로 선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효율이 떨어지면 도태될 것이며 자본주의에서 효율이란 곧 단위 노력 당 돈을 얼마나 더 또는 덜 버느냐의 싸움이다.



이런 효율 위주의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생각치 못한 수많은 직업들을 탄생시키겠지만 최소한 비용측면에서는 새로 창출될 직업에 종사하는 종사자 수는 기존의 직업에 종사하는 종사자 수보다 적을 때만 인류, 아니 자본주의에게 채택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시내버스에 안내양이 있었고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었다. 시내버스의 안내양은 교통시스템으로 대체되었는데 예를 들어, 서울의 시내버스가 3천대였다면 그 교통시스템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30명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교통시스템은 (특히 일본의 경우) 주차장에 설치되어 노인들의 주요 일자리였던 주차장 관리 시스템에서 노인들을 쫓아내고 무인으로 가동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효율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체제이고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효율이 올라가는 선에서만 도입이 되며 이 효율은 그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는 직종에서 종사자 수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뭐, 여기까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으니 굳이 가필할 필요도 없는데 아래 parrhesia님께서 관련 글에서 언급하신 이 부분에 대하여 실제 사례를 들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다.

1차 산업이 주류였던 조선시대에는 실로 고용률 100%에 육박했습니다. 저효율 체제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한반도의 경우 일제시대가 시작되면서), 실업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점차 고효율로 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잉여 인력을 야기합니다.
(parrhesia님의 전문 '기술발전의 딜레마'에 덧붙여.. 는 여기를 클릭)


조선시대에 체아직(遞兒職)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체아직은 시간선택제 일자리이다. 교체되는 관직이라는 의미로 하나의 관직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번갈아 맡으며 녹봉은 그 관직에 돌려쓰는 사람들 수로 나뉘어 지급된다. 이런 제도를 썼던 이유는 관직 부족과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관직을 맡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빈자리는 없다. 그렇다고 재정이 부족하니 자리를 늘릴 수도 없어서 만든 제도이다. 

이 제도는 당연히 해당 관직의 효율을 떨어뜨리게 된다. 현대에서는 실업자가 몇 명이 생겨도 효율을 고려하여 한사람에게 일을 전담시킨다. 만일, 현대에서 공무원들에게 이런 체아직 제도를 도입한다면 어떤 결과를 나을까?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양법을 금지시켰다. 흔히 모내기라고 표현되는 이양법은 중국의 경우 12세기 남송시절,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14세기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실시되었고 한반도에서는 고려말에 이양법이 도입이 되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양법은 법으로 금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강수량이 집중되어 수리시설이 부족한 조선의 실정 상 맞지가 않았으며 현대와 같이 소득누진세보다는 인두세에 가까운 세제 체제에서 이양법은 대규모 지주들을 탄생시켜 세원을 부족하게 만들 염려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체제의 안전을 위해 부르조아의 등장을 꺼려했던 탓이 가장 크다.(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쫓겨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조선말에 이양법이 본격화되고 효율이 높아지면서 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수많은 농업종사자들이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기록은 기술의 발전은 효율을 기준으로 채택이 된다는 것이고 효율이 올라간다는 것은 동일직종에서는 실업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