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명 싸움

'더민주'와 '국민의 당'을 놓고 보면, 전자가 더 세련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컨텐츠이지 이미지는 아니지만, 마케팅 측면이 강조되는 21세기 정치에서는 당명, 슬로건, 로고와 같은 디자인적 요소 역시 정치 역량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더민주'는 짧은 기간 인터넷 공간에서 조롱을 당한 뒤, 예전 '새누리당'이 그랬듯이 카피라이팅이 적극적으로 가미된 신개념 당명으로 정착되어가는 분위기지만, '국민의당'은 올드하고 즉물적인 당명으로 곧바로 각인된 뒤 별다른 반등없이 존재감을 상실해가고 있다.
 
안철수가 아무리 정치 감각이 뛰어나고, 승부사 기질이 강하다하더라도, 정당 정치에는 개인의 캐릭터로 채울 수 없는 집단적 역량의 영역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 부분에서 지난 10년 동안 야권의 주류로 군림해온 친노 세력이, 비록 새누리당이 2012년에 보여주었던 모델(외부 홍보전문가가 지어준 생소한 당명이 초기에는 비웃음을 사다가 점차 인정받는)의 재탕이긴 하지만, 계량 가능한 정치 역량의 측면에서는 그래도 넘버2는 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도 결국 사업이나 행정과 다를바 없는 하나의 인간활동, 노동이라고 했을 때, 안철수 신당은 당명을 결정하고, 당사를 마련하고, 인재 영입 과정에서 잡음을 최소화 하고, 소속 의원의 언행을 단속하는 등의 관리적 역량을 아직 충분히 검증받지 못했다. 만약 안철수 신당이 실패한다면 이런 요소가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적극적으로 신경쓰고 보완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인재 영입?

연일 더민주에서 신진 인사를 영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제1 야당 지위를 놓고 벌이는 경쟁의 신호탄인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는, 태풍 속의 찻잔이라고 본다. 오히려 안철수 측에서 맞대응 할 수록 찻잔이 주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야권 분열(?)의 본질은 친노세력의 무능이고, 그 근원은 결국 '김영삼의 서자'라는 그들의 지역적 정체성에 있다. 호남의 공포와 개혁진영의 반호남주의를 이용하여 야권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영남 2군의 밥그릇 정치가 궁극적으로 개혁진영의 역량을 저하하고 집권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주범이지, 이념과 가치관이 희박한 외부 명망가의 존재 여부는 정치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역량과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례대표용 명망가의 영입이 대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표모씨가 더민주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문재인 친위대 노릇 외에 뭐가 있겠는가? '호남출신 여성 삼성 임원'이라는 어떤 분이 더민주에서 쇼윈도 마네킹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안철수 현상에는 이념에 몰입되지 않은 전문가 집단과 386 이후 세대가 개혁 진영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는 세대교체의 측면도 강하게 있다. 따라서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여러 영역의 전문가를 영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영남 2군의 반호남 밥그릇주의에 대한심판으로 등장한 안철수는 존재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386에 매몰된 진보를 일신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안철수는 인재영입과 메세지 개발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더민주의 묻지마 영입과 차별화되는, '내용이 있는 인재'영입과, 그들을 통한 새로운 시대의 진보적 메세지 전달이 지금 신당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386 문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 

팔로워와 팔로잉 수가 동일한(수만 개), 소녀 프로필을 달고 있는데 묘하게 말투는 아재인 트위터리안이 올리면 10번 정도 리트윗 될 법한 이 진부한 문구가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15년 전에 동교동을 구태로 몰아붙이며 개혁 진영의 안방을 차지했던 386이, 이제는 거꾸로 본인들이 과거 동교동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누구를 탓할수 없는 역사적 흐름의 필연적 결과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읽고 사구체론을 논하던 감성과, 강남에 아파트 한채는 확보한 국회의원, 공기업 임원, 지역의원, (전직) 청와대 행정관, 시민단체 대표 등의 실존을 지닌 386은, 그 뒤죽박죽된 정체성을 친일 타령, 반민주 독재 타령, 이명박-박근혜-새누리당 악마화 같은 뻥튀기된 레토릭 정치에 투신하였고, 모든 정치적 국면에서 항상 패배하였다. 정치경제적 청사진 대결에서는 우직한 민중주의적 노동계급론에 집착해 스스로를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대변인으로 제한해 버렸다. 그래서 맑스식으로 말하면 "쁘띠 브루주아 및 농민계급의 보수주의"에 교묘하게 호응하는 정부 여당의 정책 드라이브에 언제나 패배했다. 물론 386 내부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긴 하지만 - 극우파(삼성맨 이광재)에서 부터 극좌파(쿠바맨 강모씨)까지 - 그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맑시즘적 민중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386은 단순히 학번과 나이로 대표되는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진보의 동력이었던 학생운동의 가치관이 현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청장년의 구별이 없고, 심지어 좌우익의 구별조차 없다. 정부여당에 존재하는, 학생운동의 안티테제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세력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학생운동의 질곡 아래 있는 구세대의 인사들이다. 학생운동으로 스스로를 규정 혹은 반규정하는 집단이 여야를 막론하고 거대한 축으로 존재하고, 여기에 인터넷과 SNS라는 즉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주어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똥고집과 성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서프라이즈(+딴지일보,나꼼수) 노빠들까지 가세하면서, 2010년대의 한국 정치는 매사가 1일, 1시간, 1분 단위로 나뉘고 갈리고 싸우고 물어뜯는 원형투기장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념으로, 사건으로, 인물로, 북한으로 매사가 양극화되는 흑백논리의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결국 조용하게 웃음짓는 것은 정치의 뒷면에서 차분하게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재벌관료전문가 연합세력이다.

책 속 정의와 개념을 현실에 정면 대입하고 장렬하게 산화하는 정치, 혹은 머릿속 '정의감정'을 투사하는 신화화된 대상으로서의 정치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대에 맞는 상식적이면서도, 따뜻한 감성에 기초한 정치다.  복잡하고 단단하게 짜여진 기득권 체제의 그물망을 차분하게 벗겨나갈 냉정함이다. 안철수가 짊어진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업은 이런 새로운 진보의 담지자로서 '정당'을 만들고 운영하고 사람들을 모으는 데 있다. 안철수는 이 점에 있어서는 충분한 희망을 지금까지 보여주었다. 그 내용의 부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올바른 방향으로 굴러간다면 눈은 눈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모든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나는 당분간은 안철수 신당에 표를 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