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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은 아마도 '독자 없는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누군가 이 책은 '기록'으로조차 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어도, 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썼을 것이다.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고종석은 이 책을 '정치평론서'가 아닌 '사회과학서'로 읽힌다고 평했다. 이것을 '과분한' 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단순한 혹은 속보이는 정치평론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책을 출판한 개마고원 대표 장의덕은 "영남패권주의 비판을 곧 '영남인=패권주의자'라는 비판으로 무조건 직결시키"는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의 반응인즉슨 "졸지에 영남패권주의자씩이나 되고 보니 화가 안 날 수 없다"는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알 만한 사람들조차 왜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혼동하는가"라고 회의했다.

 

장의덕은 출판인다운 심성으로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엄격하게 구분하려 했다. 하지만 난 현실적으로 그 구분이 그렇게 엄격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물겠지만 자신의 처지 혹은 과거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무리 지적이고, 훌륭한 영남인도 영남패권주의 비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사회구조적으로 비판할 때 평범한 일본 시민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내 일도 아니고, 심지어 다 지난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 비판을 듣게 될까? 아니, 좀 더 실감나게 베트남 사람들이 과거 베트남전쟁 때 일에 대해 사회구조적으로 한국을 비판하면 그걸 듣고 있는 우리 감정은 어떨까? 그렇게 엄격하게 과거 나치에 대한 사회적 교육이 잘 돼 있다는 독일의 경우는 어떨까? 평범한 독일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회구조적 비판 앞에서 불편한 감정이 전혀 없을까? 난 그렇지 않다는 여러 징후를 듣고 있다. 남성인 내겐 좀 더 쉬운 예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 앞에 선 남성도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본다.

 

문제는 그 불편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불편한 느낌을 없어야 한다고 부정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처음부터 그 불편함을 불편해 하며 아예 사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문제가 불편함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인지 아니면 불편함의 극복인지를 물어야 한다.

 

문제를 이렇게 한번 바꿔보자.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 앞에 불편함을 느끼는 영남인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간단하다. 우리나라 지역문제는 영남패권주의가 아니고, 지역문제에 관한 한  영남과 호남 모두가 잘못했다고 말해주면 된다. 이것이 노무현의 '양비론'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 기원이자 배경이다. '양비론'의 현실적 득세는 2003년 열린우리당 사태였다. 당시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쉽게 말해서 선거 때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저는 또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은 소중하고 거기 협조하지 않은 대중은 그냥 버려 두어도 좋다는 말입니까만약 개혁신당 말고 영호남 유권자를 통합하는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면 저도 개혁신당론을 접고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유시민, <오마이뉴스>, 2003년 5월 16일.)

 

나도 쉽게 말하자면, 유시민은 호남인들이 온갖 모욕을 감수하며 몰표로 지지한 민주당의 정통성 정당성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영남인들)을 위해 '양비론'에 입각한 '신당'을 그것도 '개혁!'의 이름으로 '창당'하자는 것이었다. 호남몰표로 당선된 노무현과 유시민에겐 그것이 '개혁적 통합'이었다.

 

다음에 드는 예는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남출신 군부가 주도한 광주학살까지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비유는 아니라고 본다. 만약 누군가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양비론'의 이름으로 '결혼'시키고 그것을 '개혁적 통합'이라고 내세우면 보통은 넋빠진 짓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지역문제에 관한 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비론'이 이른바 개혁주의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그 열렬한 환호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노무현은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는 것입니다."(노무현, <프레시안>, 2005년 7월 28일.)

 

노무현은 호남인들이 목숨 걸고 호남몰표로 지지했던 민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모질게 모욕하고 조롱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그랬던 그의 입에서 영남인들의 패권주의 본당 한나라당을 두고 이런 말이 터져나왔을 때 난 다시 한번 좌절했다. 이후 멀지 않아 노무현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산맥' 주장으로 최종 귀의했고, 난 최종 좌절했다. 이후 노무현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열린우리당 창당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노무현의 '개혁적 추종자들'에게 내 주장은 전혀 들리지 않는 낯설디 낯선 반개혁적 호남 지역주의자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들에겐 노무현의 죽음만이 너무나 이해하기 쉽고 원통한 비극일 뿐이다.

 

존 레논은 마술도, 히틀러도, 예수도, 케네디도, 부처도, 왕도, 짐머만(밥 딜런)도, 심지어 비틀스도 믿지 않으며, 꿈은 끝났다고 노래했다.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신도, 인간도, 노무현도, 대한민국의 개혁세력도, 애초부터 그들의 두말할 것 없는 속임수였던 '양비론'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알라딘도, 대한민국의 교양수준도 믿지 않는다. 꿈은 끝났다. 내가 믿는 건 오직 내 주장에 불편함을 느끼는 그들의  현실적 삶뿐이다.

 

그렇더라도, 물론 난 당연히 모든 영남인들이 영남패권주의에 함몰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보다 더 영남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영남인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과 무관하게 어쨌든 난 영남인들의 불편한 감정을 감정적으로 자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아주 낯선 상식>을 쓴 목적도 아니었고, 이 글을 쓰는 목적도 전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난  '그들'의 불편함을 달래주기 위해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아부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그것은 결국 영호남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가 극복해 가야 할 아물지 않은 아픈 상처다.

 

그러므로, 한때 제국이었던 나라 국민은 식민지였던 나라 국민의, 자본가는 노동자의, 백인은 흑인의, 남성은 페미니즘의, 영남인은 호남인의 사회구조적 비판에서 느껴지는 개인적 불편함을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회로는 없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불편함을 주는 것은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가 아니라 영남패권주의 그 자체다. 그것은 영호남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끼는 대한민국이 그 불편함을 없애려고 현실을 속이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건강하다고 믿는다. 나는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에서 새삼스럽게 불편함을 느끼는 대한민국을 본다. 하지만 그건 병든 과거로부터 빠져나와 건강한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을 뗀 치유의 징후다.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치유를 원한다면 병자의 그것처럼 극복해야 한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