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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alism in crisis the apologia (By Michael Roberts)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 변호론들

   

* 출처: 마이클 로버트 블로그 / 2012113

http://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12/01/13/capitalism-in-crisis-the-apolo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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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nancial Times recently launched a series of articles on “Capitalism in Crisis”. As we enter the fourth year of the global banking collapse and the long depression in real output for the major capitalist economies, the strategists of capital are trying to understand what went wrong with capitalism and what to do about it. They realise that confidence in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has plummeted, whether that is expressed in the global “we are the 99% campaign” or in the opposition of many Greeks to the austerity packages of the IMF according to a recent poll, around one in three Greeks asked now want a social revolution.

 

<파이낸셜 타임즈>는 최근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 관한 일련의 논설들을 게재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난 은행 파산과 주요 자본주의 경제들에 있어서의 실물산출량의 장기하락이 4년째 접어들고 있기에, 자본의 전략가들은 자본주의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으며 그 잘못된 것을 어찌 바로 잡아야 할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자신감이 급락했음을 깨달았다. 이 급락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는 99%이다 캠페인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IMF의 일괄적 긴축안에 대한 다수 그리스인들의 반대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한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리스인들 세 명중 한명 꼴로 당장 사회혁명이 일어나기를 원한다고 한다.

 

So the FT decided to kick off a campaign to defend the capitalist system with articles by various apologists. It started with Lawrence Summers (FT,8 January). Summers, is a former employee of Goldman Sachs and was US Treasury Secretary under Clinton before he became a university professor at Harvard. Summers tells us that disillusionment with capitalism had reached highs even in the bastion of the ‘free market’: America. A recent poll, he tells us, found that 40% of Americans asked no longer felt positive about capitalism and there was majority against capitalism among young people, ethnic minorities and the poor. Summers asked the question: are these negative attitudes justified? His answer was that it depends on whether the current crisis is due to the nature of capitalism and on whether there are any solutions within the capitalist system. For Summers, the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is no and to the second, yes. Surprise!

 

따라서 <파이낸셜 타임즈>는 각양각색의 변호론자들의 기고문들로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는 캠페인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1번 타자는 로렌스 섬머스였다(18일자). 섬머스는 <골드만 삭스>의 이전 직원이며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는 클린턴 정부 아래서 미국 재무장관이었다. 섬머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자유시장의 요새, 즉 미국에서조차도 최고조에 달했다고 우리에게 얘기한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한 최근 여론조사는 질의를 받은 미국인들 중 40%가 더 이상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며 청년들, 소수 민족 집단들과 빈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섬머스는 이 부정적 태도들이 정당한지를 질문했다. 그의 답변은 정당성 여부는 현재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인지 여부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 여하간의 해결책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Summers admitted that the Great Recession has created such a level of unemployment that the hope of getting everybody who has lost a job or seeks one back into work over the next five years is low as “the economies of US or Europe are likely to be constrained for a long time”. But nevertheless, having admitted that we are in a long depression, he argues that this slump is not due to an “inherent flaw in capitalism”. It is due to what Keynes called a “magneto problem”, like a failure of a car part that can be fixed and then the car will spring back into life. Just give the current economic policies more time and all our concerns wil soon fade. It is unclear what these policies are that will work: is it fiscal stimulus or austerity?; printing money and bailing out the banks or not?

 

섬머스는 대경기침체가 실직했거나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 모두가 다음 5년 안에 직장을 얻을 가망이 낮을 만큼 심각한 실업수준을 야기했음을 인정했다. “미국 또는 유럽의 경제들은 한 동안 위축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장기침체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 불황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결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케인즈가 마그네토 문제라고 불렀던 것에 기인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동차의 한 부품이 고장 난 것과 같다. 그 부품은 수리될 수 있으며 자동차는 다시 쌩쌩 달릴 것이다. 현재의 경제정책들에게 더 시간을 주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우려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유효하리라는 이 정책들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경기부양책인가 긴축인가?: 자금 지원으로 은행들을 긴급구제하고 돈을 찍어내는 것인가 아닌가?

 

Summers knows that one in six Americans aged between 25 and 54 years are out of work while the top 0.1% have been living the good life. And, “unlike cyclical concerns (ie the recession), there is no obvious solution at hand”. But apparently, this is nothing to do with the failure of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but due to problems “deep within the evolution of technology”. You see, agriculture gave way to industry in the 19th century and as it did so, people lost their livelihoods in the transition and inequality rose. Then in 20th century, industry gave way to services and the same thing happened. Now in the 21st century, all the jobs and incomes are to be found in the sectors raising the quality of human capital, namely health, education (where Summers now plies his trade) and housing and not in goods or other low-value services. The problem is, says Summers, is that these jobs are found mainly in the public sector and are not subject to the profit motive. Thus “in many of these new areas, the traditional case for market capitalism is weaker”. His conclusion is that we need to “shrink or at least slow the growth of the public sector” to allow the provision of these services for profit. Summers implies that profitability is no longer good enough in the existing private sector and so, to save capitalism, we must destroy public services and marketise them. It’s not a good advert for the capitalist mode.

 

섬머스는 25세에서 54세 사이의 미국인들 여섯 명 중 한 명이 실직 상태에 있는 반면 최상위 0.1 %는 유쾌하고 근사한 삶을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주기적인 사건 (즉 경기침체)과 달리,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어떤 뚜렷한 처방책도 없다.” 그러나 명백히,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실패와 무관하며 기술의 진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문제들에 기인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세기에 농업이 공업에 의해 밀려났을 때, 그 이행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고 불평등이 상승했다. 그 다음, 20세기에는, 공업이 서비스업에 의해 밀려났으며 동일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21세기에는 일자리들과 소득들은 재화들이나 기타 저가치 서비스들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질을 높이는 부문들, 즉 보건, 교육 (섬머스가 열의를 쏟는 분야), 주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섬머스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이 일자리들이 주로 공공 부문에 있으며 이윤 동기들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새 영역들 여러 곳에서, 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데 가용한 전통적 근거는 약한 편이다”. 그의 결론은 우리가 이 서비스들이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도록 공공 부문의 성장을 축소시키거나 완화할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섬머스는 기존 사적 부문에서 수익성이 더 이상 충분히 좋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를 구제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공 서비스들을 파괴하고 그것들을 민영화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광고로는 좋지 않다.

 

John Plender is a regular columnist in the FT (FT, 8 January). He is worried about the growing inequality of wealth and incomes over the last three decades in the major OECD economies. We have documented the evidence for this in many posts in this blog (see Inequality, poverty and riots, 6 December 2011 and Inequality in Britain, 28 January 2010). But Plender cites a new book by Stewart Lansley (The cost of inequality) that reveals the fast track rise for the super-rich and the stalled track for everyone else. Led by the financial sector, capitalism has become “a cash cow for a global super elite”. Plender points out that this development is nothing new indeed capitalism has an inherent tendency to increase inequality (see my post, 1% versus 99%, 21 Octovber 2011). But Plender is optimistic at least in this current slump, we don’t have soup queues and degradation as we did in the 1930s. Unemployment in the US may be near 9% officially or even 15% on fairer measures, but it is nowhere near 25% as in the Great Depression. There’s thanks for small mercies!

 

존 플렌더는 <파이낸셜 타임즈>의 정기 컬럼니스트이다(18일자). 그는 주요 OECD 경제들에서 지난 30년 동안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증대한 것에 대해 걱정한다. 우리는 이 블로그의 많은 포스트들에서 이 증대의 증거를 기록했다(<불평등, 빈곤 그리고 폭동>, [2011126일자] <영국에서의 불평등>, [2010128일자] 을 보라). 플렌더는 최고 부자들편에서의 급속한 상승궤도와 그 밖의 모든 이들 편에서의 정체궤도를 드러내는 스튜어트 랜슬리의 새 저서 (<불평등의 비용>)를 인용한다. 금융 부문에 의해 주도되어,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슈퍼 엘리트를 위한 황금 알 낳는 거위가 되었다. 플렌더는 이러한 사태전개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 실로 자본주의에는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고유한 경향이 있다(내가 써 올린 글, <1% 99%>, [20111021일자] 을 보라). 그러나 플렌더는 낙관적이다 - 적어도 이번 불황의 경우 1930년대 그랬던 것처럼 식량 배급 대기 행렬이 등장하거나 절대적 빈곤으로 떨어진 이들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미국에서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9%에 근접하거나 더 정확한 측정에서는 15%에 달하지만 그것은 대공황때의 25%와는 거리가 멀다. 이 근소한 자비에 감사할 지어다!

 

What’s wrong with capitalism is not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for profit, says Plender, but the particular form it has taken with the dominance of the banking sector. The bankers have become pirates or profiteers stealing from the decent capitalists. Thus we hear the usual argument of the Keynesians that it is the finance sector that is the problem, not capitalism. This idea of robber barons has been taken up opportunistically by the Republican rivals to Mitt Romney, the favourite for the US presidential nomination. Romney is accused by the likes of Newt Gingrich and Rick Perry of being such a ‘profiteer’ because he ran one of the largest private equity companies in America. Bain Capital was engaged in buying out companies, stripping their assets, sacking much of the workforce and then selling them on. Apparently 22 out of the 77 companies that Romney bought were put out of business. And yet what Bain Capital did is nothing more than capitalism at work: the strong win and the weak fail. It is an illusion perpetuated by Keynes, echoed by Plender, that there is a capitalism that can operate without speculation and without ‘profiteering’ and thus deliver economic growth, jobs and incomes without inequality or slumps.

 

플렌더는 자본주의의 잘못된 점은 그것이 이윤을 위한 생산양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은행 부문의 지배적 지위와 더불어 그것이 취한 특정한 형태에 있다고 말한다. 은행가들은 건실한 자본가들을 등쳐먹는 해적들이나 모리배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금융부문이라는 케인즈주의자들의 통상적인 논변을 듣는다. 강도 남작이라는 이 아이디어는 미국 대통령 후보 지명이 유력시되는 미트 롬니의 공화당 경선자들에 의해 기회주의적으로 채택되어 왔다. 롬니는 미국에서 가장 큰 사모(私募) 회사들 중 하나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뉴트 깅리치와 릭 페리 부류에 의해 그러한 모리배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바인 카피탈>은 회사들을 매입해 자산을 해체하고 노동자들 다수를 해고한 다음 다시 회사들을 매각하는 데 종사해 왔다. 롬니가 매입한 77개의 회사들 중 명백히 22개의 회사들이 사업을 접었다. 그렇지만 <바인 카피탈>이 했던 것은 자본주의 고유의 작동방식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강자는 승리하고 패자는 실패한다. 플렌더는, 투기와 모리없이 작동할 수 있고  따라서 불평등이나 불황들 없이 경제성장, 일자리들, 소득들을 안겨줄 수 있는 자본주의가 있다는, 케인즈가 영속화시킨 환상을 반향하고 있다.

 

Plender argues that the problem with capitalism is that shareholders have lost power to the management of companies. This is called the “agency problem”, which means that managers enrich themselves at the expense of employees and shareholders alike and productive investment. The answer is to restore the power of the shareholders. Unfortunately, even if this were true, Plender does not offer us any way of doing this. He recognises that regulating the banking system has failed and the role of ‘entrepreneurs’ as opposed to ‘get-rich quick’ managers has not been restored. But anyway, this is a myth. Even back in the days of 19th century capitalism, when shareholders were supposedly in full charge, economic crises were just as rife and so were banking crises. Plender ends up with an argument in favour of capitalism that is often trotted out; reformulating Winston Churchill’s aphorism on democracy, “capitalism is the worst form of economic manage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Or as Margaret Thatcher once said, “there is no alternative”.

 

플렌더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주주들이 가져야 할 권력이 회사의 경영진에게 넘어갔다는데 있다고 논한다. 이것은 소위 에이전시 문제인데, 이 문제는 경영자들이 고용인들과 주주들 양자 모두와 생산적 투자를 희생시켜 자신들을 배불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결책은 주주들의 권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진실이라 해도, 플렌더는 우리에게 이 해결책을 실행할 아무런 방도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은행 시스템 규제가 실패했으며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경영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기업가들의 역할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플렌더의 주장은 신화이다. 주주들이 온전하게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19세기 자본주의 시기에도 경제위기들은 끊이지 않았고 은행위기들 또한 그러했다. 플렌더는 종종 과시되는 자본주의 찬성론으로 끝을 맺는다; 민주주의에 관한 윈스턴 처칠의 경구를 재정식화하자면, “자본주의는 시도되어온 모든 다른 경제관리 형태들을 제외하면 최악의 경제관리 형태이다”. 또는 마가렛 대처가 언제가 말했던 대로, “대안이 없다.”

 

John Kay (FT, 10 January) is an Oxford economist who regularly writes for the FT. He points out that Marx never used the word ‘capitalism’ and what Marx attacked as a mode of production in the 19th century has disappeared or metamorphosed into something else. And here we go again. The owners of the means of production (now pension funds, insurance companies, banks etc) no longer control their companies or hire or fire people. That’s left up to the managers now. Ownership and control are now “divorced”. So business leaders are “no longer capitalist” in the sense that Marx described them. So the answer to the current crisis is not to end the private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as the Marxists say, but to find ways of making control of companies more democratic.

 

존 케이 (110일자)는 정기적으로 <파이낸셜 타임즈>에 기고하는 옥스포드 경제학자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결코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가 19세기에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격했던 것은 사라졌거나 다소간 그 밖의 어떤 것으로 변형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같은 주장을 조우하게 된다. 생산수단 소유자들 (현재는 연기금들, 보증회사들, 은행들 등등)은 더 이상 그들의 회사들을 통제하거나 사람들을 고용 또는 해고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경영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소유권과 통제권은 이제 분리되어있다. 따라서 사업 지도자들은 더 이상마르크스가 그들을 기술했던 의미에서의 자본가들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의 해결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회사들의 통제를 더 민주적이게 할 방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This is pretty much the same argument as Plender. What is wrong with capitalism is that there is not enough of it. If the owners of capital took more control, things would be better. Apart from the fact that there is no evidence in the past that this was the case, for what purpose would owners do this but to boost profits and in particular dividends? How would that help growth and jobs, unless you reckon that in some way owners would invest more than the managerial elite? And anyway, that does not explain why there a regular cycles of boom and slump, whether companies are ‘controlled’ by their shareholders or not, whether they are multinational or not, or whether executives are overpaid or not. The private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matters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the owners decide investment, employment and incomes paid to the top and the bottom. No top manager survives if he or she cannot deliver an increased dividend (or higher share price) to the shareholders and that means making higher profits. That is literally the bottom line.

 

이것은 플렌더의 주장과 꽤 동일한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잘못된 점은 그것이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 소유자들이 더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면, 사태들은 호전될 것이다. 과거에 사실이 그랬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윤, 특히 지분을 증대한다는 것 외의 어떤 목적을 위해 소유자들이 더 통제권을 행사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소유자들이 엘리트 경영자들보다 더 [생산적으로] 투자하리라는 가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성장과 일자리들에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여하튼간에, 그것은, 회사들이 주주들에 의해 통제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회사들이 다국적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또는 최고경영자들이 과도한 급여를 받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왜 정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이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보면 소유자들이 투자, 고용 그리고 상위직 고용인들과 하위직 고용인들의 급여 소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을 의미하는 바, 주주들에게 증대된 지분이나 더 높은 주가를 안겨줄 수 없다면 어떤 최고경영자도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한선이다.


Samuel Brittan is a long-time FT columnist and closet Keynesian (FT, 13 January). Brittan tells us that market capitalism fails to reward on “personal merit” i.e. you don’t get paid a lot of money or have a lot of wealth under capitalism because you are clever or work hard. However, capitalism is the best system because “it promotes personal and political freedom” as the “individual is free to use his abilities in line with his own choices”. Really! Tell that to the majority of people toiling away in a very modestly paid jobs in an office or shop, working long hours, with limited holidays and a poor pension. Would they agree that they have plenty of life choices as a result? What would the poor of Africa, Asia and elsewhere make of the idea that they are free to make their own choices?

 

사무엘 브리튼은 <파이낸셜 타임즈>의 장기 컬럼니스트이자 은밀한 케인즈주의자이다(113일자). 브리튼은 우리에게 시장 자본주의가 개인 공과에 따라 보상하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즉 자본주의 아래서 당신은 영리하거나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많은 돈을 받거나 큰 부자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개인이 그 자신의 선택들에 따라 자유롭게 그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음으로 해서 개인적 및 정치적 자유를 촉진하기 때문에 최상의 체계이다.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 사무실이나 상점에서 휴일들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빈약한 연금과 더불어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으며 장시간 고역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보라. 그들이 하나의 결과로서 생활상의 풍부한 선택들을 누린다는 데 동의할 것 같은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그 밖의 곳들의 빈자들이 그들이 자유롭게 그들 자신의 선택들을 행한다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Yet Brittan tells us that, under capitalism, we can choose whether to spend our incomes in “personal pleasure or social service at home or the relief of poverty abroad” as we wish. The individual makes the decision, not the government. Brittan quotes the liberal apologist for capitalism of the mid-19th century, John Stuart Mill, who argued that if everything was in state hands, there would be no personal freedoms. Thus Brittan invokes the alternative to capitalism with its ‘free personal choices’ against the model of stalinism and state authoritarianism. There are no other models, according to him. Yes, a few cooperatives might be more democratic, but that’s it.

 

브리튼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는 우리의 소득을 가정에서 개인적 유흥이나 사회적 서비스에 쓸지 아니면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해외의 빈곤을 경감시키는 데 쓸지선택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정부가 아니라 개인이 결정을 행한다. 브리튼은 19세기 중반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변호론자인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하는데, 그는 모든 것이 국가의 수중에 있다면 개인적 자유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논했다. 따라서 브리튼은 스탈린주의 및 국가 권위주의 모델에 대립해서 자유로운 개인적 선택들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에서 대안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어떤 다른 모델들도 없다. 소수의 협동주의적 모델들이 더 민주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이다.

 

To end his piece, Brittan tells us that he is shocked at the role of the financial sector and how its “activities could undermine the capitalist order”. Yet again, there is nothing wrong with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in its production sphere; it’s the monetary or financial sector that is flawed and causes instability and inequality. As if economic cycles of boom and slump and inequality did not exist before the financial sector became a hegemonic force in modern capitalism. So the answer, for Brittan, is international regulation of the financial sector and “the retention for quite a long time in public ownership of the banks and other institutions that have had to be rescued by government”. Thus the financial sector must remain under the ‘authoritarian’ grip of the dreaded state sector, but not the rest of ‘productive’ capitalism.

 

그의 글을 끝맺으면서, 브리튼은 우리에게 그가 금융 부문의 역할과 어떻게 그것의 활동들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잠식할 수 있는지에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역시 그것의 생산영역 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도 없다; 결함 있으며 불안정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은 통화 또는 금융 부문이다. 브리튼은 금융 부문이 현대 자본주의에서 헤게모니 세력이 되기 전에는 호황과 불황의 경제주기들과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브리튼에게서 해결책은 금융 부문의 국제적 규제, 그리고 정부에 의해 구제되어야 했던 은행들 및 다른 기구들을 상당한 장기간 동안 공적 소유 아래 두는 것이다. 금융 부문은 공포스러운 국가 부문의 권위주의적장악 아래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 외의 생산적자본주의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To sum up, Marx was wrong. Capitalism is the best of alternative systems of human organisation; and it has changed significantly since Marx criticised it. Unfortunately, some of those changes are for the worse (managers stealing profits; the finance sector undermining stability). Apparently, we can correct those flaws either by going back to 19th century capitalism where owners not managers ruled (Plender and Kay); or by having state control of the financial sector (Brittan); or by increasing the role of private sector in running public services for a profit (Summers). Not very convincing, is it?

 

요약하면, 마르크스는 틀렸다. 자본주의는 여러 대안적 인간 조직 체제들 중 최상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르크스의 비판을 받은 이래 상당히 변모해 왔다. 유감스럽게도, 이 변화들 중 몇 가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이윤을 도둑질하는 경영자들; 안정성을 잠식하는 금융 부문). 명백히, 우리는, 경영자들이 아니라 소유자들이 지배했던 19세기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에 의해서든 (플렌더와 케이) 금융 부문을 국가가 통제하는 것에 의해서든 (브리튼) 공적 서비스들을 수익성 있게 운영하기 위해 사적 부문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것에 의해서든 (섬머스), 그 결함들을 정정할 수 있다.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