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라도 경상도 따지는 것보다, 부자놈들 족쳐야 된다는 입장이고, 왜 열심히 일하는 데 돌아오는 것은 이거야? (를 따지는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박스로 인용한 황우님의 말씀처럼, 보통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분들은 계급투표는 긍정적으로, 지역주의투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게 일반적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역주의는 분명히 타파되어야 할 봉건적인 유물이 맞죠. 그러나 만약 호남이 지역주의가 아니고 계급적 갈등이 발현되는 투표를 하고 있는거라면? 그래서 만약 호남의 멀쩡한 계급투표가 지역주의투표인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이만 저만 심각한게 아닐겁니다. 전제가 오류라면 그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 역시 모두 오류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만약 호남이 지역주의가 아니라면, 호남의 투표를 지역주의의 결과라고 전제하고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적주장들과 진보적담론들은 죄다 쓰레기통으로 처박혀야 마땅한 것이겠죠.     

저는 호남의 몰표를 전라도 경상도 따지면서 벌어지는 현상쯤으로 간단하게 묘사하는 황우님의 용감무쌍함이 참 부럽기는 한데, 그런 태도는  황우님 뿐만 아니라 책깨나 읽었다는 식자층들과 깨어있다 자칭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갖고 있는 보편적 견해와도 같은 것이라서 딱히 황우님한테만 뭐라 할 수는 없을겁니다. 

"특정 정당에 몰표를 던진다"는 외형적 유사성만을 갖고 현상을 판단하는 태도는, 마치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이 길다는 것만으로 남녀를 구분해버리는 식이 되기가 쉽습니다. 보통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대부분 보여지는 현상 아래 숨겨진 본질이나 구조같은 것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인데, 유독 이상하게도 호남의 몰표에 대해서만은 전라도 경상도 따지는 수준의 지역주의쯤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치부하고 넘어가는게 일반적이죠. 치열하게 사회 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본질을 탐구하다가도 호남의 몰표만 딱 마주치면 이거 지역주의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현상.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닐테고 당체 왜 그러는지 정말 궁금할 따름이고, 이상한 현상이죠.

사실 어떤 유권자의 투표가 지역주의 투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전체적인 선거결과만 놓고서 지역주의적 경향성이 있다 없다만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지, 유권자들의 머리속을 스캔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함부로 객관적인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을겁니다. 가령 영남의 서민들이 자신들이 계급적정체성을 배반하고서 기득권 정당인 한나라당에 투표할 때에, 그것만으로는 아직 그 사람들이 지역주의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것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막연히 계급배반투표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지역주의 때문인 것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거죠. 그저 외형적 유사성만으로 유추해서 파악하는 추정일 뿐입니다. (물론 영남 서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계급배반투표는 지역주의말고는 달리 설명할 변수가 없긴 합니다.) 

영남처럼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지역에 대해서도 그런 회의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게 당연할진데, 하물며 호남의 서민들이 계급적정체성에 걸맞는 투표를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그것을 간단하게 지역주의투표라고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태도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때 나오는 쉬운 반론이 '지역주의가 아니라면 90% 몰표라는 이상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일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반론이죠. 그들 스스로 한국 사회를 20:80으로 나뉜 사회, 나아가 요즘은 한술 더 떠서 1%를 위해 99%가 희생당하고 있는 사회라고 주장하고 99%가 단결해야 하느니 마느니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도, 정작 호남의 90% 몰표에 대해서는 이상한 현상으로 부른다는게 저는 정말로 이해가 안갑니다. 

그 사람들은 만약 수도권의 서민들이 어느날 똘똘 뭉쳐서 민주당을 90% 이상으로 지지한다면 그때에도 지역주의라고 부르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수도권 시민들이 드디어 각성했다.' '계급 투표의 위력을 실감했다' 면서 찬사를 늘어놓을 사람들이,  정작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호남의 90% 몰표만은 뭔가 이상하고 패권주의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어 있는 것이고, 그들이 정말로 진보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건지부터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뒤통수 잘치는 호남인들이 진보적이라니 부르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는걸까요?

물론 이런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호남이 정말로 계급투표를 하고 있다면, 왜 민노당같은 계급정당들이 아니고 허접해보이는 민주당을 지지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반론이죠. 우선은 민노당이 민중들의 계급적지향을 담아낼 수 있는 정당이냐부터가 의심스럽고, 자본주의적 계급 모순과 갈등이 사람들을 자동으로 마르크스주의적 구호 아래 모여들게 할거라 생각하는 유아적인 발상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참 웃기는게, 마르크스서적 몇권 읽고나면 사람들이 예외 없이 웅장한 판타지를 그린다는 겁니다. (물론 부끄럽지만 과거의 저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대규모 시위라도 벌이고 권력을 접수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만 계급 투쟁쯤 되는 걸로 착각하는거죠. 솔직히 영화찍는거고, 적어도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내용적으로 일상화된 한국적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 제로입니다. 

저번에도 비슷한 취지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계급 투쟁이 벌어지는 현장은 절대로 민주노총에 소속된 노조 간부들이 붉은 띠 매고서 사용자들을 호쾌하게 겁박하는 단체협상장같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호남의 서민들과 촌로들이, 수도권의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이 별 생각없이 은밀하게 기득권 정당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 그래서 자본가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뺏어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계급투쟁인 것이죠. 계급투쟁은 어쩌다 한번씩 벌어지는 화끈하고 재미있는 불쑈같은 시위가 아니라, 익숙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벌어지는겁니다. 바로 선거이죠. 노동자들의 화끈한 파업농성은 자본가들의 정치 권력에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하지만, 기득권 정당에 반대하는 어떤 무식한 호남 촌로의 한 표는 자본 권력의 심장에 꽂히는 총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호남의 90% 한나라당 반대표를 지역주의라고 욕해대는 자칭 진보주의자들과 친노들, 그 간절한 계급적 몰표를 비웃으면서도 자신들의 천박한 정치적 입신을 위한 호주머니의 현찰처럼 취급하며 영남의 의석 몇개와 교환하려는 자들은 얼마나 미친 놈들인겁니까? 그런 미친 놈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차라리 호남이 기득권정당에 투표해서라도 내부의 배신자들부터 응징해야 한다는 호소는 어쩌면 눈물겹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호소를 척결해야할 수구라고 간단하게 비웃는 철없는 자들이 진보를 논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까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