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에 결국 이기적이다?
 

다음은 이기성/이타성 논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가상 대화다.

 

S: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야.

A: 그렇지 않아.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도 많지만 이기심을 포기할 때도 있어.

S: 그건 착각일 뿐이야. 모든 행동에는 이기성이 도사리고 있어.

A: 낯선 도시에서 어떤 할머니가 큰 곤경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잠깐만 시간을 내면 쉽게 할머니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하자.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도와줄 거야. 가난해 보이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도 없어 보이고, 할머니이기 때문에 연애나 성교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없어 보이고, 보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평판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할머니이기 때문에 나중에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

S: 나도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도와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해. 하지만 네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 할머니를 도와준 다음에 사람들이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는 거야. 뿌듯함이나 보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지. 그것이 쾌감이라는 점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쾌감이나 성교를 할 때의 쾌감과 다를 바 없지. 결국 그 사람을 그 쾌감을 얻기 위해서 할머니를 도와준 거야. 이런 면에서 선행도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지.

 

쾌락을 매우 폭넓게 정의한다면 미각에서 오는 쾌락이나 성적 쾌락뿐 아니라 뿌듯함, 보람 등도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불쾌에는 통증과 같은 것뿐 아니라 죄책감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보상(reward)과 처벌(punishment)라는 개념을 쓰는데 넓은 의미의 쾌락과 불쾌와 상응하는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상식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내가 반박하고 싶은 것은 쾌락 추구와 불쾌 회피를 절대화하려는 경향이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리라는 이름으로 절대화하려고 했으며, 행동주의는 강화, 보상, 처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절대화하려고 했다. 과학의 교권보다는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공리주의 역시 쾌락(행복)을 절대시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효용 개념에도 비슷한 가정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먼 조상들에게는 쾌락이 없었다
 

포유 동물의 경우에도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상당히 먼 조상들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개미는 어떨까? 개미도 쾌락을 느낄까? 개미와 인간의 공동 조상은 어떨까? 그들도 쾌락을 느꼈을까?

 

개나 고양이는 뭔가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미에게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는 매우 힘들어 보인다. 쾌락 개념을 느낌 개념과 분리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쾌락 개념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단세포 생물에게도 쾌-불쾌 메커니즘이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쾌-불쾌 메커니즘은 생물의 진화의 어느 시점에 새로 생긴 것이다. 생명이 처음 탄생했을 때에는 없었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생물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쾌-불쾌 메커니즘이 필수불가결하지는 않은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 쾌-불쾌 메커니즘이 개입되나?
 

망치로 무릎을 때리면 자신도 모르게 발차기가 된다. 이것은 뇌를 거치지 않고 일어나는 반사 행동이다. 인체에 있는 모든 근육의 움직임을 행동이라고 정의한다면 뇌를 거치지 않고 일어나는 행동도 많이 있다. 그런 행동 중 많은 것들은 쾌-불쾌 메커니즘과 상관 없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통 행동이라고 칭하는 것(의식적 의도가 개입된 행동)은 어떤가? 모든 행동에 쾌-불쾌 메커니즘이 개입된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 있는가? 내가 보기엔 없다. 그렇다고 쾌-불쾌 메커니즘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의식적 행동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사람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만 산다”라는 명제를 확신에 차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쾌락과 불쾌가 충돌할 때 – 양적인 측면
 

어떤 행동을 할 때 쾌락과 불쾌를 모두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불닭을 먹으면 몹시 매우면서도(불쾌) 맛있다(쾌락). 불길 속에 있는 자식을 구할 때에는 뜨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식을 구한 데서 오는 안도감도 느낀다.

 

이런 행동을 보고 S는 불쾌보다는 쾌락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그런 분석이 대체로 맞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인간의 쾌락은 포괄 적응도에 이득이 생기는 정도에 따라 더 커지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쾌는 포괄 적응도에 더 큰 손실을 입으면 더 커지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행동이 쾌락과 불쾌를 모두 유발할 때에 쾌락이 크다면 그 행동을 하고 불쾌가 크다면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포괄 적응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인간이 불쾌보다는 쾌락이 더 크다고 판단한 행동만 하는 것일까? 만약 쾌-불쾌 메커니즘과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욕망이 있다면 불쾌가 크더라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들은 남자가 절망에 빠지면 강간을 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결혼이나 합의에 의한 성교를 해서 자식을 남길 수 없다면 강간이라는 매우 위험한 전략을 취하는 것이 더 적응적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가설이 맞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논의의 편의상 맞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절망에 빠진 남자는 강간으로 인해 얻게 되는 성적 쾌감보다는 그로 인해 당할 수 있는 보복으로 인한 불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앞으로 더 번식할 가망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기존에 존재하는 자식이나 손자에게 매우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위기에 처한 손자를 구하기 위해 나서면 자신이 부상을 당해서 엄청나게 고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자를 구하려고 하는 노인의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손자를 구하는 데서 얻는 안도감보다 부상으로 인한 고생이 더 크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욕망과 쾌락
 

여기서 욕망 역시 매우 폭넓게 정의된다. 보통 욕망 하면 식욕이나 성욕을 떠올리지만 이타적 욕망도 욕망이다. 즉 곤경에 처해 있는 남을 돕고자 하는 충동 등도 욕망에 포함된다. 쉽게 말하자면 욕망은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의식적인 행동만 생각해 볼 때 사람은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즉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고 산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때로는 하기 싫은 것도 하며 산다는 점을 들며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어떤 어린이가 청소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데도 청소를 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이는 하기 싫은 것을 했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그 어린이는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는가?”라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이의 욕망은 청소에 대한 것 말고도 많이 있다. 예컨대 그 어린이는 엄마한테 혼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 어린이가 청소를 했다면 청소를 하는 것도 싫지만 엄마한테 혼나는 것은 더 싫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욕망 메커니즘은 쾌-불쾌 메커니즘보다 계통발생적으로 더 오래되었다. 쾌-불쾌 메커니즘은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욕망 메커니즘에 덧붙여진 것이며 욕망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행동을 하다가 커다란 통증을 느끼면서 된통 당하게 되면 그것이 기억에 남아서 그 행동에 대한 욕망이 작아지도록 한다. 반대로 어떤 행동을 하다가 큰 쾌감을 느끼게 되면 그 행동에 대한 욕망이 커지도록 하기도 한다. 이것이 행동주의자들이 강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갓난 아기가 처음 젖을 빨 때처럼 쾌락이나 불쾌에 대한 의식적 고려가 없어도 욕망 메커니즘은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갓난 아기가 처음 젖을 빨 때 쾌락이나 불쾌에 대한 무의식적 고려가 있는 것일까? “무의식적 고려”의 의미부터 정하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2009-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