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노(serf)에 대한 개념을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합니다.

아래 인용된 부분에서 '이러한 예속성을 지닌 농노 신분을 노예 신분과 다르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생활주체로서 재산을 소유하고 가족을 구성하면서 법정에도 출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 부분에서 '법정에서 자기방어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죠.


세종대왕 때 한 노비가 아동성추행을 하자 그 노비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재산이라면 '즉결처분'이었겠죠. 사회 안전 차원에서 주인에 의하여.


형조에서 계하기를 “평해(平海)에 있는 죄수 김잉읍화(金仍邑火)는 여덟 살 난 계집아이를 강간했사오니,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4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11월 17일(병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26년 윤6월 10일에 대신 김당 등이 왕에게 종친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 벌을 청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왕실 종친인 고령감 이팽령이 개인 노비 봉원의 딸 순금과 관계했다. 순금은 “여인이라 거역할 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이틀 밤을 함께 했다”고 사헌부에 고소했다. 중종은 사건 조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위력으로 간통하였다면 이 또한 강간”이라며 처벌을 하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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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때 사형을 당한 김잉읍화는 조선일보에서는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신분이 노비였습니다. 그리고 중종 때의 노비를 성폭행(강간)한 종친을 처벌을 하교한 것은 노비에게 형식적으로나마 '법에의 자기방어권'을 인정한 것으로 이는 노비='사고 파는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하 인용.



농노와 농노주와의 관계는 여러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농노는 인신(人身)이 하나의 물건으로서 예속된 노예와 비교하면 보다 자립적 ·자유적 존재이지만, 일체의 전근대적 속박에서 해방된 독립 자영농민(自營農民)과 비교하면 자립성이 보다 낮으면서 부자유한 존재였다. 농노에게는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토지가 대여되어 자립적 농업경영이 허용되었으나, 그에 대한 보증으로서 농노주에 대한 인신상(人身上)의 예속관계가 수반되어, 노역(勞役)을 비롯한 현물 및 화폐의 공조(貢租)를 제공해야만 하였다. 특히, 농노주의 직영지(直營地) 경영에 노역을 바쳐야 하는 농민은 농노주에 대하여 강한 인신예속(人身隷屬)의 상태이어서, 좁은 의미로 보면 농노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현물(現物) 및 화폐의 공조를 부담하는 농민은 보다 자립성이 높은 존재로서, 넓은 의미로 말하면 농노 또는 예농(隸農)이라고 한다. 그 어떤 경우이든 농민은 토지 소유자는 아니고, 토지의 이용만이 조건부로 허용된 토지보유자에 불과하였다. 다만 농노의 경우는 토지의 보유권보다 그 이용권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예농의 경우는 소유권에 더 가깝다.


  하여튼 일반적인 농노는 봉건사회의 농민에 관계되는 개념이지만, 사적 특질(史的特質)에 대응해서 농노개념의 적용방법에서는 차이점이 생긴다. 이것을 대별하면 법학적 영역과 경제학적 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법학적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농노가 승려 ·귀족 ·평민과 더불어 봉건사회 신분 구성의 한 요소라는 점이며, 더욱이 고유한 인신적 ·세습적 예속성을 가졌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예속성을 지닌 농노 신분을 노예 신분과 다르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생활주체로서 재산을 소유하고 가족을 구성하면서 법정에도 출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물건이 아닌 법적 인격으로서 농노는 원래 신분 규정이다.


  ② 경제학적으로는 농노를 봉건사회에 있어 기본적 노동력의 담당자라는 관점에서 그 특징을 자기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즉, 고대의 노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물건 ·도구로서 주인의 소유대상이 되었고, 근대의 임금노동자가 생산수단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과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봉건사회의 농노가 토지 ·농구 ·역축(役畜) 등의 생산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계급사회의 지배관계는 노예제에서는 직접적 폭력,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상품경제의 경제법칙을 통하여 성립하는 데 대하여, 생산수단이 직접 생산자와 결합하는 농노제의 경우에는 인신적(人身的)인 ‘경제외적 강제(經濟外的强制)’를 통하여 지배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점에서 농노는 봉건적 농민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정된 좁은 의미로서의 용어는 경제외적 강제가 노골적 ·직접적인 형태로 행하여지는 경우는 농노로 보다 완화되어 관습화된 경우는 예농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대체로 노동지대(勞動地代:勞動賦役)의 단계는 농노, 생산물 내지 화폐지대(貨幣地代)의 단계는 예농으로 본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상품교환의 법칙을 통해 자본가가 이윤을 흡수하는 것이지만, 봉건사회에서는 영주와 농민과의 사이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로 나타나고, 이것에 의거하여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수탈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영주 직할지에 있어서의 주부역(週賦役) ·공납(貢納) ·결혼세 ·상속세 ·이주세(移住稅) ·인두세(人頭稅) 등을 포함한 기타 여러 가지 임시 부역과 과세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봉건시대의 착취를 실현하는 법적 근거로서 영주재판권이 있었다.


  한편, 봉건지대가 노동지대에서 생산물지대로, 나아가 화폐지대로 형태가 전화(轉化)해 감에 따라, 경제외적 강제 형태도 변화하였으며, 관습 또는 성문법(成文法), 더 나아가서는 계약적 화폐관계로 전화되었다. 이리하여 농민이 독립적인 자영농민이 되면서 경제외적 강제도 점차 소멸하게 되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