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저자인 '윌터 벤 마이클스' (문학교수이자 작가)의 다른 글인 "다양성에 맞서서(Against Diversity)"라는 글은 지금은 아크로를 떠나신 칼도님에 의하여 번역이 된 적이 있었죠.


두 글의 차이는, '다양성이 불러 일으키는 폭력'을 언급하되, 칼도님의 글은 미국을 그리고 이 글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글을 주제로 썼습니다. 칼도님께서 번역하신 글과 같이 읽어 보시라는 의미에서 칼도님의 글을 여기 링크합니다.(전문은 여기를 클릭)



근무시간에 메일함을 열어보았다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소식지가 와있길래 여기에 전문을 인용합니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 --> 올릴려고 했다가 급한 일 생겨서 임시저장했다가 지금 올립니다. ^^



자유, 박애… 다양성

이와 같은 프랑스의 흐름에 대해, 미국인으로서 필자는 혼재된 두 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다. 첫째는 다양성이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인 삶뿐만 아니라, 특히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해 온지 거의 30년이 됐는데,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늑장 대응할 수 있을까 싶은 놀라움이고, 두 번째는 왜 프랑스가 마침내 이 '늑장 대응'을 수습하겠다고 결정했는가 하는 실망감이다. 


이 글은 첫 번째 의문에는 답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역사학자들이 다뤄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해선, 다양성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MIR(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프랑스 원주민 운동 단체)에서부터 국가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지층들이 이미 그 해답을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종·성차별, 불평등 효과 '분산'

사람들은 "부자와 빈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주와 노동자, 주인과 하인, 백인과 유색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평등하다는 역설적인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얼 뜻하는가?(3)"라고 한 MIR 운동가가 제기한, 다양성이 아닌 평등에 대한 의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평등에 대한 의문 자체가 중요하다. 특히 대립관계인 주인과 하인, 그리고 백인과 유색인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았을 때, 구조적인 붕괴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백인과 유색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의 불평등은 무엇보다도 차별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불평등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만 근절시키면 된다.


하지만 부자와 빈자, 사주와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의 시발점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소유관계에서 비롯된다. 경제적 불평등 측면에서 보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분류 시스템처럼 작동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불평등 자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평등의 효과를 분산시키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인종차별과 성차별 투쟁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를 쟁취해도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는 줄지 않을 것이다. 승리는 단순히 그들을 성별이나 성적 취향 혹은 피부색에 따라 분류할 뿐이다. 보다 많은 흑인들이 부자가 된다고 해서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한층 평등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흑인과 부자 흑인 사이에 격차만 커지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다양성과 자유주의의 공존

물론 프랑스의 상황은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2차 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좌파의 지배적인 흐름은 오로지 경제적인 평등을 걱정했다. 페미니즘, 인종차별, 동성애 등과 연관된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들이 되어 버렸거나 단순히 무시됐다. 


하지만 25년 전에 이미 우선 순위가 뒤바뀔 정도로 상황은 변했다. 자유주의 변혁이 불기 시작한 1983년부터 차별 투쟁(특히 'SOS 인종차별'이 주도한)은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정치 어젠다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후 이 정치 어젠다는 평등 투쟁(차별 투쟁에다 평등 투쟁을 가미시키는 대신에)으로 전환됐고, 다양성을 지지한 참여운동은 자유주의 봇물을 담고 있던 정치적 방벽을 약화시켜 버렸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는 경제 자유주의와 호환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반면에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없애겠다거나 줄여보겠다는 의지는 그렇지 못하다. 후자가 다양성(편견은 타파하지만 '차이'는 반기는)을 지지하며 참여운동에 나서자, 프랑스 지도층은 자신들의 자유주의 성향을 한층 강화시켰다. 우파(니콜라 사르코지라고 해서 다를까?)의 특징을 지닌 이 운동은 종종 자신들 스스로를 좌파라고 일컫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물론 필자는 긍정적인 차별(혹은 일반적인 다양성을 위한 참여운동)이 불평등을 가중시킨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다양성을 위한 투쟁의 기반이 되는 사회 정의의 개념 자체가 신자유주의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즉, 우리의 근본적인 사회 문제가 착취보다는 차별과 비관용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흑인, 갈색인, 황인, 백인, 여성, 남성, 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의 부자의 숫자가 비율적으로 같을 경우, 부자와 빈자간의 경제적 격차를 인정하는 사회 정의의 패러디가 문제다. 요컨대 '사회 정의'가 자본주의가 촉발시킨 불평등을 수용하고 있는 꼴이다. 이는 심지어 출신이나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불평등을 양산시키는 경제 시스템을 극대화 시키는 셈이다. 다양성은 평등을 정착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불평등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신자유주의가 본 '다양성과 평등'


다양성과 신자유주의의 당위성에 뒤늦게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지도층들은 빠른 진척을 보여주고 있다. '차별에 맞선 평등쟁취 투쟁 최고위원회'(Halde)의 루이 슈바이처 회장은 2006년 보고서에서 평등 개념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내비쳤다.


"만약에 우리가 평등을 믿는다면, 다양성의 부재는 차별이나 혹은 기회 균등이 잘 준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4)" 


요컨대 슈바이처 회장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백인과 남성들뿐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고, 만약에 그들 중에 흑인, 갈색인 그리고 여성들이 있다면 문제가 더 이상 없는 것이며, 만약에 출신이나 성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제공되는 성공의 기회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빈곤 때문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부 논객들은 이런 성찰의 근원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은 Halde가 세운 최고 경영진 스쿨 첫 입학생의 '눈에 띄는 마이너리티'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루이 슈바이처가 오랫동안 노조 탄압으로 여러 차례 처벌받은 적이 있는 르노 사를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이 두 가지 문제 제기는 목표를 잘못 조준한 것이다. Halde의 문제는 Halde를 운영하는 이 스쿨의 다양성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이 기관은 다양성면에 있어서는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축구팀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또 루이 슈바이처가 노조를 탄압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양성을 지지하며 좌파 노조와 대립한 것이 위선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엘리트의 영구화와 다변화 사이에는 그 어떤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엘리트들을 합법화시켜주기 위한 것이지, 그들을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랑스 혁명'을 요구


신중한 사업가인 슈바이처 회장은 다양성 지지에 동참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경영 전략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MIR과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다양성 지지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고 있다. 미래의 CEO들에게 "사업 분야에서의 전 지구적인 국제교류 시각"을 제공하겠다고 고심한 끝에, 카를로스와 자베에 라바소는 2007년 <국제교류 경영 입문. 다양성 관리를 위하여>5)를 출간한다. 이 저서가 특별히 진보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양성을 다루고 있는 장을 읽다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한줄, 한줄 읽다보면 MIR의 '좌파들'이 썼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MIR의 지도자 중 한명인 사드리 키아리가 '프랑스 내 시각'6)이 아닌 세계 시각을 가지고 문화적인 다양성을 고심하는 '통합 좌파'를 질책하는 내용은, 라바소 형제가 세계적인 시각에서 다양성은 지지하면서도, 자국 내에서는 그렇지 않은 유럽 국가들을 질책한 내용과 함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p.168). 


마찬가지로 MIR은 '국가와 사회'를 향해 "프랑스 혁명 당시 공고해진 평등 보편주의를 다시 비판해 달라"고 호소한다. 비즈니스 스쿨의 두 교수인 라바소 형제는 '다양성, 차별 그리고 긍정적인 행동에 대한 논쟁을 주제'로 '새로운 프랑스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p.194). 
출신, 성별, 장애, 연령, 성적 취향 등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 다양성은 금융 일간지 <레제코>가 '경제적인 급선무'7)라고 일컬은 지위를 쟁취했고, 좌파도 우파만큼 신속하게 이 새로운 '급선무'를 위해 열광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인 사회 문제는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기 때문이지, "경제적 차이가 축소돼서가 아니다"고 한, 예전 미국에서 성행했던 논리가 프랑스에서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프랑스도 미국에서처럼, 신자유주의 우파는 마침내 신자유주의 좌파를 찾았다. 우파는 이들이 원하는 대로 신자유주의 좌파 딱지를 붙여주며 행복해 한다. 그리고 기업 내에서 다양성을 개발해서 노동시장과 증권시장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할 때면, 심지어 이 '혁신' 좌파는 아방 가르드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안달한다는 지적이다.


격차 수용 '착취보단 차별·비관용이 문제'…신자유주의 잉태
인종·성차별 저항운동, 경제적 불평등 등 '긍정적 차별' 용인
빈부, 불평등 '그 자체의 개성' 인정?…'다양성' 개념의 허구

 
신자유주의 우파 사르코지 노선

신자유주의 우파와 신자유주의 좌파가 다양성에 관한한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의견일치처럼 비칠 수 있다. 어쨌거나 니콜라 사르코지가 2007년에 국가 정체성을 기치로 내세운 프로그램 덕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던가? 그가 선거 유세 중에 알랭 팽키엘크라우트 같은 가장 보수적인 지식인들까지 매혹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당선되자마자, 그가 서둘러 '이민 및 국가 정체성 부서'를 신설하지 않았던가? 이 부서를 신설한 사르코지는 곧바로 2008년 "다양성은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어 그는 이 투쟁이 자신의 임기 동안 핵심 사안이 될 것임을 밝혔다. 신자유주의 좌파는 종종 사르코지를 마치 실제 인종 차별주의자인 것처럼 공격한다. 이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해명을 덧붙이면, 만약 신자유주의 좌파가 신자유주의 우파를 외국인 혐오증을 보이는 위장된 낡은 우파처럼 묘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전자와 후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간 <리베라시옹>지의 사장 로랑 조프랭은 사르코지가 이민과 국가 정체성에 대해 조그만 실수를 저지르면 환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좌파는 사르코지가 극우파인 장-마리 르펜과 가까운 것보다 훨씬 더 사르코지와 가깝다. 이들 둘은 모두 (온건한)자본주의, (조절 가능한)시장경제 그리고 (합리적인)자유무역을 지지한다. 물론 프랑스 대통령은 그래도 이런 것들을 지키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좌파보다 조금 낫다. 반대로 사회당은 조프랭 자신이 씁쓸하게 밝힌 것처럼 사회주의란 단어에다 현대적이면서도, UMP(프랑스 대중운동연합8)의 정책과 확연히 구분되는 정의를 제공하기 위해 항상 애를 쓰고 있다.


그 목적은 실제로는 좌파의 정치적 입장은 아무것도 채택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좌파라고 선언하겠다는 의도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고, 또한 자본주의의 급진적인 비판은 이제 한물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미국인들은 그 해답을 찾았다. 우리는 차이를 만들어 내며 끊임없이 정체성을 두고 싸운다. 예를 들면, 긍정적인 차별을 반대(왜냐하면 백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공화당원들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하는 것은 우파의 입장일 수 있고, 지난 수년 동안 우리가 흑인들에게 가한 차별에 대한 보상차원이라고 민주당원들이 주장하고 있듯, 긍정적인 차별을 지지하는 것은 좌파의 입장일 수 있다. 


'불평등' 개념의 혼돈

모든 이는 모든 이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다양성과 연관된 의무와, 평등(일부는 자신들의 부를 포기해야 한다)과 관련된 의무를 비교해보면, 다양성을 지지하는 적극적인 동참이 미국의 좌파정치의 프로젝트를 부자들의 피부색이나 다양한 성적 취향에 맞춘 프로그램으로 전환시켜 버렸는지 알 수 있다. 좌파정치의 프로젝트는 부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돈에 손을 대지 않고도 보다 '안락'해 질수 있고, 이들이 보다 '안락'하다고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돼버렸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1966년 미국의 '블랙 팬더 당' 공동 설립자이자 민권 운동가인 바비 실리는 동료들에게 "인종차별의 존재를 앞세우며 우리의 투쟁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은 가난한 백인, 가난한 흑인, 스페인계 갈색인, 인도인, 중국인 그리고 가난한 일본인 등 대중의 착취를 지지하는 셈"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흑인 자본주의를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착취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는 사회주의를 이용해서 자본주의를 타파하고자 한다" 9)고 실리는 분명히 밝혔다.


후자의 시각에서 동떨어져 있다면 결국 '흑인 자본주의'와 연계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한 문제는 문화적인 차이이며, 경제적인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경제적인 차이조차도 문화적인 차이로 다루기 시작했다.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다 존중해주고, 그들을 희생자로 취급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자 취급하는 것은 그들의 '개성'을 무시한 채, 그들에게 동정이나 베푸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존중을 받지 못하는 개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된다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들의 가난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우리는 우리의 개혁 노력을 계층 철폐에 집중하지 않고, 우리 미국인들이 '계급 차별'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거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방식은 불평등을 우리 사회 시스템의 결과라기보다는 편견의 결과처럼 다시 분석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평등한 사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개개인이 자신의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그리고 동성애혐오증 등을 없애도록 이끄는 계획으로 바꾸었다.


'히잡 사건'의 의미와 논쟁


프랑스가 이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자유다. 학내 히잡 사건 같은 경우 끝없는 토론이 있었고, 앞으로도 이 같은 토론은 반복될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여기서의 문제는 피에르 테바니앙의 지적처럼 '위장 토론'에 있다. 왜냐 하면 히잡을 쓰는 몇몇의 어린 소녀들이 프랑스나 혹은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히잡 착용 목적이 종교적 중립원칙을 해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히잡 사건 이후로 그 토론이 이처럼 대단하게 확산되었을까? 


테바니앙은 그 이유를 모든 사회 계층과 정파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잠재적인 인종차별10)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 답변은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거나, 심지어 징후적인 면에서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잡 사건에 대한 토론은 '반인종차별주의'와 '반성차별주의'의 유혹의 힘을 세상에 알렸기 때문이다.


두 진영은 이 사건을 마음껏 즐겼다. 전자가 후자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할 때, 후자는 전자를 성차별주의자로 몰아 세웠다. "당신들이 이슬람 히잡 착용을 반대하는 것은 당신들이 무슬림들의 권리를 무시하기 때문이야!", "당신들이 그것을 찬성하는 것은 무슬림여성들을 무시하기 때문이야!"


이 토론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서 긍정적인 차별을 두고 옥신각신 했을 때처럼, 매 순간마다 정체성문제 만을 다뤘기 때문이었다.


토론의 기회가 부족해서 이런 종류의 새로운 논쟁거리의 뇌관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프랑스 역사를 둘러싼 논쟁이 끝임 없이 재현되는 것도 바로 그런 모델이다. 좌파 운동가들은 MIR의 목소리를 빌어 프랑스가 "공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역사를 회복하고 진흥시키는데 무척 소홀히 한다고 한탄하고 있다. 보수 우파는 알랭 팽키엘크라우트와 그의 동료들의 목소리를 빌어, MIR이 프랑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받아들이든지, 그렇제 않으면 프랑스를 떠나든지 해야한다"고 11) 주장한다.


타산적인 미국식 다양성 존중

그리고 팽키엘크라우트가 과거 프랑스가 저지른 잘못과 범죄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신랄하게 굴고 있긴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동료인 미국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써먹은 방식에서 곧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들의 문화, 역사, 성 정체성, 복장 취향 및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존중해주는 것이 그들에게 높은 봉급을 주는 것보다 저렴하게 먹힌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동화시켰다. 하긴 CEO가 된 제자들은 값싼 인력이 '떠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전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에서 다양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12)의 공동 저자인 백만장자 기업인 야지드 사베르는 2008년 11월 야심차게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13)라는 선언문을 신문에 싣는다.  그리고 한 달 뒤, 국가원수인 사르코지는 그를 '다양성과 기회균등 부서'의 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우파와 좌파 인사들의 서명과 함께 영부인 카를라 브루니-사르코지의 지지를 받은 이 선언문에서 "미국이 균등과 다양성 위에 세운 민주주의 모델의 타당성을 확인시켰다"고 주장했다. 영부인은 "엘리트들이 변화하도록 도와야 한다" 주장했다. 그것은 엘리트들의 지위를 조금이라도 문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다 흑인들로, 보다 무슬림들로, 보다 여성들로 만들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보자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 문학교수, 2월 20일 발간 예정인 <평등에 대한 다양성>의 저자. 출판사 레종 다지르, 파리.

1)<리베라시옹>, 2008년 3월 8-9일, 파리
2)AP통신, 2008년 11월 27일
3)www.lmsi.net/spip.php?article471,octobre 2005.
4)http://halde.fr/rapport-annuel/2006
5)카를로스와 자비에 라바소, <국제교류 경영 입문. 다양성 관리를 위하여>, 파리, 출판사 Ellipses, 2007년
6)Sadri Khiari, www.indigenes-republique.org/
spip.php?auteur6, 2006년 11월 18일
7) <레제코>, 파리, 2008년 2월 22일
8)<리베라시옹>, 2008년 3월 31일
9) 바비 실리, <시간을 잡아라.>, <블랙 팬더 당과  휴이 P의 스토리>, 출판사: 뉴턴, 블랙 클래식 프레스, 볼티모어, 1991 (1970 년), p. 71
10)피에르 테바니앙, <미디어 차도르. 위장 토론; 이슬람 히잡 사건>, 파리, 출판사, 레종다지르, 2005년, p.12
11) 알랭 팽키엘크라우트, <그들은 어떤 종류의 프랑스인들인가?>, 
Dror Mishani와 Aurelia smotriez와 Ha'aretz 텔아비브에서 가진 대담 중에, 2005년 11월 17일
12) 출판사 <오가니자시옹>, 2006년
13) <일요신문>, 파리, 2008년 11월 9일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