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일본 원자탄 투하의 역사적 사건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도 논쟁 중'으로 알고 있다.

그 논쟁 중에 제기된 주장 중에 가장 슬픈 주장은 '미국이 핵무기 성능을 실험하기 위하여 고의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사실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원자폭탄을 개발한 아이쉬타인 등의 과학자들도 핵무기의 위력에 놀랐다고 하고 그 이휴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하여 지구종말시계를 만들었던 사건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미군부도 핵무기에 대하여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며 '단지, 좀더 위력이 좋은 폭탄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당신들 머리 위에 쏟아부을 수 있다'라는 기대감 정도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기는 하다.


이 논쟁의 논점은 '원자폭탄을 과연 일본 본토에 투하할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것이고 투하를 찬성하는 진영에서는 당시 2차 세계 대전 종료 막바지에 일본은 '일본 본토 사수대'가 결사항전의 태도를 보이고 있고 따라서 일본 본토 상륙을 시도하는 경우, 수백만이 넘는 인명 손실을 훨씬 적게 할 수 있었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투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한반도 분단에서 보는 것처럼, 미군의 정보망이 허술하여, 붕괴 직전의 일본 군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결과였으며 따라서 귀책사유는 '정보에 어두웠던 미국 당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미국이 정보에 약했다'라는 내용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본 군대를 너무 과대평가하여 전혀 필요하지 않은 소련군의 개입을 요청했으니까.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이던, 내 입장은 전쟁 당시 원자탄으로 인한 인명손실의 증감 여부가 아니라 그 전쟁의 피해가 후손에 되물림 되고 있다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원자폭탄의 투하는 어쩌면 차라리 당시에 수백만명의 인명 손실이 추가로 나는게 더 낫지 싶다. 물론, 이 입장은 내 입장일 뿐 맞다고는 생각치 않다. 마치,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에 얽힌 찬반논리와 같은 논리이므로.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수백만명의 인명 손실을 막는 것이 더 낫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것이며 이런 동의를 한다면, 1945년 8월 15일 토쿄광장에서 생긴 일과 결합한다면 '일본인들은 원자탄에 맞아도 싸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 1945년 8월 15일 원자탄을 각각 히로시마야 나가사키에 얻어 맞은(?)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일본의 왕이 라디오를 통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을 반복하여 방송하고 토쿄 광장에서는 수천만의 인파가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한다.(실제 당시 토쿄광장이 있는지는 기록에 명기되어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 상황을 적은 기록에 의하여 수천만의 인파가 동시에 무릎을 꿇을만하려면 광장이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에 명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항복에 무뤂을 끓고 대성통곡을 하던 일본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일어나서 주변의 은행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여전히 일왕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방송은 계속되는데 토쿄광장에는 인파가 거의 업었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던 일본 신민들(subjects)들은 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발생할 은행 예금 동결을 예상하고 자신이 예금한 돈은 찾으러 은행으로 몰려간 것이다. 은행은 이내 북새통을 이루었다는 것이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던 1945년 8월 15일 토쿄 광장에서 발생한 일이었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3. 이 것을 원자폭탄 투하와 연결해 보자. 일본 신민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나라 걱정보다는 자신의 예금 찾을 일을 앞세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결국, 신민으로서 위에서 시키면 죽음도 불사하겠지만 스스로는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즉, 일본본토결사 항전의 지시 앞에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수 있는 것은 지시 때문이며 따라서 일왕이 항복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최후의 1인까지도 싸울 것이고 그렇다면 원자폭탄 투하로 항복을 빨리 이끌어내는게 인명 손실을 적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맞다고 생각하는가? 1945년 8월 15일 토쿄광장에서 생긴 일을 들어 '일본인들은 원자탄에 맞아도 싸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말하느냐고?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혹자는(김완섭이 그런 주장을 최초로 했다) 명성황후가 시해가 되었어도 통곡을 하는 조선민중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데 이런 논리라면 1945년 8월 15일 토쿄광장에서의 일을 들어 '일본인은 원자탄에 맞아도 싸다'라는 논리 역시 정당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명성황후, 그러니까 조선 숙종 때의 장희빈의 라이벌인 인현왕후의 후손인 명성황후는 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물리쳐야 했던 것처럼 명성황후의 가문인 '민씨'는 조선 후기에 조선 역사에 암적인 존재로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역사에 존재의 이유가 없는 '잉여인물'이다.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들 때문에 민중들이 가렴주구를 당하고 그 이유 때문에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시키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민중사관처럼 '역사는 민중이 이룬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부패상이 외부의 침략을 정당화 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조선 중세에 조선 지배층은 나라를 경영할 동력을 잃었는데 그런 나라를 위하여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할 절호의 찬스를 막은, 민중들에게는 영원한 적이라는 이야기인가?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