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hy?'와 'how?'


담벼락의 링크를 타고 뽐뿌에서 경상도 출신이라는 익명의 유저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의 조직원들이 '노골적으로 호남차별적 발언'을 해서 근무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의 게시물을 보았다. 정황 상 호남차별로 유명한 섬유세제를 만드는 P회사는 아닌 것 같다. 역공작의 가능성-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호남차별의식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도 있어 보인다. 


어느 쪽이든 그런 류의 글들이 꾸준히 올라오는 상황 자체가 짜증이 난다. 차라리 개인에게 '이 새X, 저 새X'하는데 훨씬 더 낫다. 해서는 안되는 '지역차별성 발언'이기도 하지만 공학적으로도 왜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이 아직도 발바닥 수준인지를 가늠케 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공학관련 논문들이나 기술서들을 읽다보면 유럽이나 미국 쪽은 'why?'라는 방법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그러나 일본 쪽 논문들은 'how?'라는 방법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개발기간 때문에 항상 쫓기는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유럽이나 미국 쪽의 논문들 또는 기술서들보다는 일본 쪽의 '그 것들'을 선호한다. 일본 쪽의 그 것들에는 당장 활용이 가능한 응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으므로.(뱀발 : 내가 일본어를 학창 시절부터 배운 이유. 그리고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쫌' 하는 이유이다 ^^)


이런 'why?'와 'how?'의 차이는 박정희 경제개발 정책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 아래 펼쳐진 경제개발에 '어떻게 해야 잘사는지 실천적 방법'은 많이 제시되어 있지만 '왜 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전혀 없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오늘날, 천민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나라가 되었다. 요즘, 스티브잡스를 거론하면서 인문학이 언급되는데 한마디로 '개발의 편자'격이다.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여 문과생들도 수학을 더 많이 배우고 이과도 인문학적 분야를 더 공부한다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 부분은 박근혜 정권이 잘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why?'와 'how?'는 호남차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시쳇말로, 호남사람들이 뒤통수를 잘치고 거짓말을 잘한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why?',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은 한결같이 'how?', 그러니까 어떻게 뒤통수를 맞았고 사기를 당했는지를 기술하는 것 뿐이다.



다행히도(?) 인터넷이 호남차별을 부추키는 도구로도 작동시켰지만 반대로 호남차별을 타파하는 도구로도 작동했다. 그래서 이제는 'how?'가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베발, '7시 사람들' '해외인들'이라는 호남차별 발언은 'how?'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을 외국인 취급하여 '차별을 당연시 하는 주장의 논거'라는 것이다.



2. '통구이' 발언에 얽힌 소소한 언쟁


'통구이'라는 발언을 두고 나와 짧은 언쟁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언쟁을 기억나는대로 짧게 기술한다.


한그루 : 다음에서 통구이라는 표현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분 : 이상한 분이네. 써서는 안되는 표현을 두고 웃음이 나오다니
한그루 : 왜냐고요? '내가 아픈만큼 상대방의 아픔도 이해할 것이니까'


이 소소한 언쟁을  "<지역평등시민연대 성명서> : 디씨인사이드 야구 갤러리 회원들의 유쾌한 반란"(전문은 여기를 클릭)에 대입하여 직설적으로 질문을 해본다.


"만일, 통구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지 않았다면 그 '유쾌한 반란'은 발생했을까?"


나는 결단코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남의 죽음이 나의 고뿔만 못하다'라는 속담은 그냥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속담은 사람들이라면 가지기 마련인 이중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 이외에 '사회적 공개념'의 희박함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투고라님께서 언급하신 이 유쾌한 반란은 유쾌한 반란이 아니라 아주 슬픈 합의이다. 


'내가 아파야 상대방의 아픔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이 글 서두에 언급한 'why?'가 아니라 'how?'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파야지만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문제는 '내가 아픈만큼 상대방의 아픔도 이해한다'라는 '학습효과'가 우리 사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몇분에게 말씀드렸지만 우리나라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학습효과'가 없는 나라이다. 실수의 반복이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수천번 외침을 당하고도 나라를 유지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라는 말은 뒤짚어서 이야기하자면 '한민족은 정말 멍청한 민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몇 년에 한번씩 외침을 당하고도 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는게 자랑할만한 일인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는 삼성에서는 '업무 상 잘못에 대하여 관대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일한 잘못에 대하여는 가혹할만큼 징계를 내린다'고 한다. 이건 학습효과가 없다는 것에 대한 응징이다. 일개 기업에서도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런 '학습효과'가 전혀 없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나 집단을 통해 사회적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사람이나 집단은 그냥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정책 발언은 이런 '학습효과'가 전무한 국가나 사회의 결과이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유쾌한 반란'이 '슬픈 합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 '유쾌한 반란'은 하나의 헤프닝으로만 남겨질 것이라는게 내 판단이다.


3. 담벼락 노숙자들의 아우성

물론, 나와 얽힌 사건 중에 가끔 짜증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나는 담벼락의 노숙자들이 '극단적인 지역주의자들'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아파보았는가? 나는 아파보았다. 다리가 골절되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 운전사에게 '아침부터 재수없이 병신 새X가 지X이야"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한두번 들었으면 그런 발언을 한 운전사들을 '특이한 사람'으로 치부하겠는데 수시로 들었다. 물론, 내 잘못도 있다. '목발을 짚은 병X 주제에' 꼬박꼬박 노트북을 들고 다녔으니까. 물론, 친절한 운전사들이 더 많았지만, 오죽하면 내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골절된 부분에 힘이 가해져 잘못되면 그 땐 우리도 장담 못합니다'라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를 직접 몰고 회사를 출퇴근했을까?


아파봐야만 상대방의 아픔을 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내 자신도 'why?'가 아니라 'how?'적 저급인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이 정서적 공유는 아니다. 대학교 때, 죽마고우 한 명이 임파선암(흔히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친구가 입원한 병원 입원실에 찾아가 펑펑 울었지만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고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는 (당시 나는 고학생이었다) 친구의 안위보다도 다음날 일할 걱정, 리포트 걱정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친구의 죽음보다 다른 걱정을 한 내가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용서하라. 사람이라면 지대한 인륜주의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나를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담벼락에서 종종 짜증을 내는 이유이다.

나는 담벼락 노숙자들의 아우성을 '나는 아프다, 그러니 너도 아파봐라'로 이해한다. 그러니 그들이 극단적인 지역주의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들이 그런 아우성을 하는지에 대한 'why?'는 없고 'how?'만 생각하니 그들이 극단적인 지역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방법 상으로는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그들이 극단적인 지역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당신'이 제안하라. 합리적이라면 내가 먼저 나설테니까.


문제는 그들의 아우성을 이해하면서도 내가 짜증을 내는 이유는 '정서적 공유를 하지 못하면 바리 영남패권주의자로 몰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죽마고우 침대 앞에서도 일 걱정, 학점 걱정을 한 천박한 인간이다. 어쩌겠는가?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이런 내가 용납되지 않는다면, 나를 영남패권주의자로 낙인 찍어도, 뭐 별 수 없다. 나는 꾸준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밖에.


4. 'how?'에서 'why?'로의 전환은 힘든 것일까?

내가 언급한 일본과 유럽의 이 차이를 들어 일본의 한 학자는 이런 고뇌어린 술회를 했다.

"물질적으로는 따라갔지만 유럽의 저 오랜 전통인 정신은 언제 따라갈 것인가?"

탈아입구로 대변되는 일본의 컴플렉스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고뇌 어린 술회에 나는 엄청 비웃어줬지만 그래도 일본은 최소한 한국보다는 훨씬 낫다. 한국은 아직, 'how?'에서 'why?'로의 전환을 고민하는 학자들은없어 보이니까. 그리고 불행한 것은 현 대통령은 물론,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는 인물들 중에 이런 고뇌를 담은 인물은 없다는 것이다. 안철수에게 약간의 희망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천박하기 그지 없는 인물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뿐이다.

"꼴값 그만 떨고, how?나 잘해라. 이 빌어처먹을 것들아"


뱀발)담벼락 노숙자들의 아우성을 할 공간을 만들어주신 오돌님에게 감사. 왜? 솔까말, 그 쪽이 여기보다 더 재미있으니까 ^^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