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이재정, 백종천 등이 최근 펴낸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10·4 남북정상선언>의 내용을 놓고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김정일이 김대중과 함께 발표했던 6.15선언을 빈 선전갑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중앙일보에 의해 크게 소개됐던 것이다.

김만복이 과거 여러가지 수준 이하의 구설을 일으켰던 일이 드러나고 박지원이 친노세력에게 일종의 '경고'를 보내면서 이 사안은 수면 아래로 숨어드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회성 해프닝 또는 친노세력의 실수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나는 의견이 다르다. 이 사건은 일시적인 해프닝 또는 친노세력의 실수가 아니다. 면밀히 계산된 행동이고, 상당히 오래 전 어쩌면 노무현의 집권 이전 행보의 연장선에서 나온 결과물이고 그래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친노세력의 행동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고 본다.

이 책의 내용이 중앙일보에 보도된 것은 일반 서점 전시대에 책이 깔리기도 전 즉 사전 판매 예약을 받던 시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사전에 책의 내용을 놓고 중앙일보와 접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책을 공식 판매하기 전에 언론사에 배포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십권씩 쏟아지는 신간서적을 기자들이 다 읽고 그 가운데서 의미있는 부분을 쪽집개처럼 추려내서 기사화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앙일보에서 문제의 내용을 기사화한 것은 신간서적 담당기자가 아니라 무려 '정치부' 기자들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자기과시성 서적이 쏟아져나오는 시점에 한 물 간 과거 정권의 과거 정치인들이 펴낸 책을 두고 거대 중앙지의 정치부 기자 두 명이 달려들어 책 내용을 분석하고 해부해서 그 중 정치적으로 예민한 부분을 딱 찍어서 크게 기사화한다? 만화책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합리적인 해석은 이것이다. 김만복 등 이 책의 저자들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배경인 친노세력 차원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이슈화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야 정치부 기자 두 명을 갑자기 동원한 중앙일보 데스크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코 실수일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지형 특히 야권의 혼란상을 이해한다면 더욱 그런 해석이 불가능하다. 현재 야권의 혼란과 지형변동을 어떤 사람이 어떤 논리로 설명한다 해도 본질은 하나다. 즉, 친노세력에 대한 호남의 분노와 이반이다. 그리고 그 분노와 이반은 김대중과 호남 정치세력에 대한 노무현의 배신과 폄하, 모욕에서 출발한다.

친노세력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반호남, 반김대중 본성을 가급적 감추려고 노력해왔다. 현실적으로 호남과 결별하면 친노세력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본질을 언제까지나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친노세력도 그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그 핵심부는 알고 있다. 상호대립하는 두 가지 불가능성이 충돌한다면 결국 선택은 불가피하다.

친노세력이 그동안 나름 감추려고 해왔던 김대중과 호남 정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새정련을 뛰쳐나간 호남 정치인들의 정치적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상황과 맞물린다. 간단히 말해서 새정련 탈당파의 정치적 성공 가능성과 친노세력의 호남/김대중 적대감의 표면화는 거의 1대1의 비례관계를 그릴 수밖에 없다.

호남의 표심을 여전히 친노의 영향력 아래 묶어둘 수 있다면 친노 입장에서 김대중은 여전히 활용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새정련 지지세력을 친호남/김대중 성향과 그 반대의 성향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반호남/반김대중 세력이 야권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점을 타격해야 한다. 그래야 김대중의 정치적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것이 6.15선언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시작 단계이다. 무엇보다 아직 호남 유권자들의 친노세력 이탈이 전면화됐다고 판단하기는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역 친노세력이나 그 중심부가 아닌 과거의 친노 예비군세력, 이른바 2진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보는 것이다.

친노세력은 지금 호남과의 결별 내지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김만복 해프닝이 정말 친노세력의 실수라면 파문이 일어났을 때 새정련 친노세력 차원에서 변명 또는 해명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다. 이번 김만복 등의 발언이 그들의 본심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상황 봐서 그런 발언의 후속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어차피 친노세력에게 정권 탈환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핵심 관심사는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 보존하면서 편하게 국회의원 및 지방선거에서 과실을 따먹는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 개인적인 성취 외에 따로 추구하는 정치적인 목표는 없다고 봐야 한다. 정치란 그들에게 잘 팔아먹을 수 있는 이벤트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박지원의 '경고' 운운하는 소리는 차라리 애처럽게 들린다. 떠날 준비를 다 마친 연인에게 "당신 그동안 나와 함께하면서 실수했던 것 다 까발릴 거야" 하는 얘기가 얼마나 먹힐 것 같은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불가능한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애초부터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양아치한테는 뜯어먹기 쉬운 만만한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한테는 자신에게도 힘없는 가족 아닌 그럴싸한 보호자가 있다는 대외적인 명분이 절실했던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떨어질 팀은 떨어지듯이 정치에서도 갈라설 세력은 갈라선다. 친노세력의 핵심부는 호남이 떨어져나갈 경우 힘들기는 해도 독자적인 생존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 집권 이후 줄기차게 김대중과 호남정치를 모욕하고 폄하해온 성과물이기도 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학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구축해온 486 리더십과 영남의 진보진영, 극성스러운 깨시민들이 결합하면 사실 호남의 정치적 영향력 따위는 의외로 쉽게 압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호남의 인구가 충청보다 줄었다는 통계도 있겠다, 사실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결연한 다짐을 공유했는지도 모른다.

제일 측은한 것은 호남정치를 모욕하고 폄하하는 친노세력의 사고방식과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든 일치시켜온 호남 내부의 친노그룹이다. 이들은 그동안 친노세력의 정체를 감추는 알리바이로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각자 냉정하게 자신의 입지를 검토해보면 가슴 서늘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친노세력은 여전히 호남의 변화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편으로 전면적인 결별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을 과거의 상태로 묶어두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예고없이 닥쳐올 수 있다. 성경도 말하는 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돌아오시는 재앙의 그때를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드로후서 3장10절)

그 날은 '도적같이' 올 것이다.